<영문학자·전남대 명예교수> 무등산 덕산 계곡에 매미가 울기 시작하고 있다. 벌써 2주째다. 여름이 고개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매미 울음은 아직 아기 걸음처럼 서툴다. 어렵게 일어나 아장거리더니 금방 주저앉아버린다. 아직 힘을 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자리를 잡았나 싶을 만큼 제법 가락을 내다가도 오래 울지 못한다. 마치 이유도 없이 가버리는 그 사람 같다. 울음을 얻기 위해서는 매미 소리도 힘을 타야하나보다. 매미소리가 힘을 타기 위해서는 더 억센 소나기를 만나야 한다. 소나기를 만나면 산에 풀이 검고 사납게 약이 차는 여름이 무르익는다. 그래서 잠깐만 스쳐도 칼로 베듯, 잎날이 새파랗게 선다. 아직 산행하는 우리 가운데 산 풀에 손을 벤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산행하는 사람 가운데 아직 매미소리를 의식하는 사람도 드물다. 다만 비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 있어 마음속에 매미소리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여름은 고개 앞에 이르렀다. 그래서 무등산 중봉에는 이미 고추잠자리가 뜨고 있다. 날고 있다는 말 대신 뜨고 있다고 말한 것은, 나는 멋이 아직 어설프기 때문이다. 빛깔도 아직 노랗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되기까지는 아직 수 없이 더 소나기를 겪어야 한다. 잠자리는 겨우 몇 마리가 아직 연습 비행을 하고 있다. 멋지게 씽씽 달리면서 한참 신이 나면 각을 지으면서 비상하는 비행술을 아직 익히지 못하고 있다. 고추잠자리에 멋이 생기려면 아직 멀었다. 그 미숙한 노랑 잠자리도 서석대로 올라서면 아직 보기 힘들다. 고산까지 올라가기엔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서석대에는 여름 바람이 아니다. 이내 서석대는 고추잠자리가 난무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잠자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멀리 뭉게구름이 다 소나기가 되어 쏟아져버려야 한다. 월요일에 무등산 서석대 산행에 대한 사연이 있다. 월요일 서석대 산행은 일품이었다.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문 인적의 멋을 안다. 가끔 고산에서 그 드문 인적 때문에 겁이 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스스로 그 겁을 줄기는 매조키즘이 있다. 이 여름 사람들은 대개 바다로 간다. 더구나 비가 잦은 요즘 같은 여름에 서석대 산행은 정상적인 산행 풍경이 아니다. 더운 여름에도 산에 가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그들도 주말을 선택하는 것이 평상이다. 주중도 아니고 열병이 아니라면 월요일에 산행한 사람은 없다. 프로 야구도 월요일엔 쉬지 않은가. 월요일에도 가끔 큰 짐을 진 객지에서 온 본격적인 등산객을 만나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의 산행 인구가 아니다. 나의 산행 인구는 히말라야를 꿈꾸는 사람처럼 그런 벗어난 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월요일 나는 무등산 서석대에 갔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1930년생이니까 내가 나서 80회가 되는 날이다. 올 생일은 나에게 두 사람이 20명이 된 기하학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 20명이 모이기 좋은 시간을 고르다 보니 회동이 주말로 앞당겨졌다. 그래서 산행이 월요일이 되었다. 월요일은 소나기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바위산에서 만나는 소나기는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위험하다. 번개라도 치면 아찔하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이 있다. 혼자 산행하면서 소나기를 만나면 나이를 잊고 나는 이상하게 흥분하면서 생기를 얻는다. 자유 같기도 하고 정열 같기도 하고 젊음 같기도 한 원시를 만난다. 그래서 나는 산에서 만난 소나기를 나의 생명발생 현상이라고 믿고 있다. 마음에 안든 세상에 소나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 나이 들면서 누구나 변화는 부담이다. 그러나 산행에서 만나는 변화인 소나기는 나에게 부담이 아니라 힘이고 낭만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낭만인 산행 속의 소나기를 사랑한다. 지난 월요일 행운하게도 나는 무등산 산행에서 큰 소나기를 만났다. 그날은 소나기에 천둥도 울리고 번개도 쳤다. 천둥이 없는 소나기는 소나기가 아니다. 모진 바람과 천둥과 소나기를 고산에서 만난 나의 80회 생일은 나의 낭만이고 큰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