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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시론] 고3 수험생이여! 24시간만 쉬자 형광석 교수(목포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11월은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달이다. 1929년 11월 3일은 일제의 강점과 폭압에 맞서 학생이 일어난 날이다. 이제 11월 3일은 그 명칭도 올해부터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뀌었다. 1970년 11월 13일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온몸을 던져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친 날이다. 11월은 오직 바른 길을 생명으로 알고 실천하는 피 끓는 학생과 청년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에 획을 그은 달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달에 대학입학으로 가는 첫 시험이 있다. 대학입시제도는 변천을 거듭했다. 1969년부터 1981년까지는 대학입학예비고사가, 1982년부터 1993년까지는 대학입학학력고사가 시행되었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고 있다. 어느 시험이든지 그 취지는 대학 입시 위주로 이루어지는 고교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도입하는 것이란다. 그런데도 최근으로 올수록 고교의 공교육이 정상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사설학원이 엄청나게 늘어나 사교육이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6년 11월 16일은 수능의 날이었다. 유치원 3년, 초등 6년, 중학 3년, 고교 3년 등 총 15년간의 학교교육을 통한 학습의 결과를 전면 평가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18년을 중간 결산하는 날이었다. 수능을 본 학생들이여! 글을 깨친 이후부터 공부에 참 많이도 시달렸다. 그래도 깨달음의 기쁨이 있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독서실로, 눈코뜰 새가 없었다. 고교에 입학해서는 신 새벽부터 일어나 다음날 새벽 한 두시까지 눈을 총총히 뜨고 부라렸다. 어제 아침 일찍 대학수학능력시험 현장을 둘러보았다. 가방을 등에 메고 점심도시락을 손에 들고 나타나는 수험생과 학부모. 고사장 입구에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수험생인 형과 언니들에게 따끈한 차를 타주고 이름을 소리 높이 불러 응원하는 후배들. 제자를 격려하는 여러 선생님. 가히 독립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을 전송하는 듯한 비장한 모습이다. 수험생은 지난 15년간, 짧게는 집중적으로 3년간 잘 훈련된 수험전사이다. 수험전사여! 이제 그대는 인생 전쟁터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한 전투를 치렀다. 오늘의 전투결과에 너무 속상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전투에서는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 비록 오늘의 전투에서는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 인생 전쟁터는 수많은 전투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입학전투, 국방의무이행전투, 취업전투, 배우자 찾기 전투, 직장생활전투, 재테크 전투, 2세 잘 키우기 전투, 사회적 지위 쟁취 전투, 초고령사회에 대비한 노후준비전투 등등…. 전쟁에서 이기려면 24시간 원칙을 지켜야 한다. 미국의 스포츠계에서 한때 잘 나갔던 어느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24시간만 그 경기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한다. 지고 나서 시무룩하게 있는 것도 24시간이요, 이기고 나서 우쭐해 있는 것도 24시간이었다. 24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점에서 출발해 선수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조국을 떠나 해외에 정착해 성공한 중국 화교는 세 가지를 명심했다고 한다. 쉬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 아프지 말라. 수능이 이제 끝났으니 푹 며칠 쉬고 싶을 것이다. 마땅하다. 어느 누구도 수긍할 수 있다. 그래도 오래 쉬면 리듬이 깨진다. 24시간만 쉬자. 쉬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아프지 말자. 2년 전에 어느 대학원생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요즘 대학 새내기는 놀지도 않아요. 고3생의 리듬 그대로 공부를 미친 듯이 해요. 그래선지 어린나이에 고시에 합격한 아이들이 많은가 봐요. 이번 입시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24시간만 기뻐하고 시무룩해지자. 고3생과 같은 생활의 리듬을 그대로 대학생활 때에, 재수할 때에, 사회생활 때에 이어가자. 그리하여 여러분이 나고 자란 고장인 광주·전남에 밀착된 세계지향 인재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신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가르치고 뒷바라지 해주신 선생님과 부모형제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하실 줄 믿는다. 성공하려면 ‘미인대칭’해야 한다. 미소, 인사, 대화, 칭찬….
칼럼
남도일보
2006.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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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자네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닌가.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 병이 들어 주변에서 단방약이란 단방약은 다 대고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빈손으로 먼 의원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 의원이 며칠 침을 놓고 약을 달여먹이고 하니 아이가 화색이 돌아오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농부는 가진 것이 없으니 한달 일을 해서 치료와 약값을 갚겠다고 제의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의원은 농부의 고개를 들게 하고 ‘자네 자식의 병은 내가 아니라 자네 정성이 고쳤네’ 하고 말하고 돌려보내려고 하였지만 농부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원은 말했다. ‘자네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닌가. 잘 키우게. 커서 잘되면 찾아오게나’. 그 이야기 속에 아이가 커서 잘 되었는지 여부는 전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농부나 농부의 자식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의원의 미담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더러 그런 어른들이 있었다. 아마 그런 미담은 세 가지 입장에서 전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는 베푸는 입장이고, 또 하나는 도움을 받는 입장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적 자식사랑의 입장이다. 베푸는 입장은 한국 상위 층의 일종의 노블리스오브제와 관계가 있고 도움을 받는 입장은 그 속에 도움을 받고 싶은 소망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질긴 것은 자식사랑의 입장일 것 같다. 자식사랑은 특히 한국에서 전통적인 사고방식이요 생활양식이며 생존 양식이었다. 세계적으로 자식 사랑은 동양의 특징이고 특히 한국의 그것은 유별나다. 이것은 아마 거의 ‘동물적인 생존 양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나는 생존을 위협하는 한국적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한국에 난리가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자 하는 것이다. 외침이 많아 늘 생존을 위협받고 있을 때 자식이라도 살려야 하는 절박한 소망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가 한국을 침탈했을 때도 한국의 자식사랑의 정서는 손보지 못했다. 한국을 지배해 무엇보다도 먼저 손댄 것이 토지문제로 경계가 애매한 토지를 측량, 정확하게 배분해 각 문중에 소속되었던 토지를 개인 소유로 해 문중의 단합을 와해시키는 시책으로 한국인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사람들의 자식에 대한 집착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인의 자식에 대한 집착을 이용해 식민정책을 강화시켰다. 자식만 봐주면 그들의 식민지 정책 수행에 저항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자네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닌가’ 는 한국인의 자식 사랑에 대한 금과옥조다. 이 이상 더 적절하게 그 정서를 상징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시대에 적절한 말인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있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면서 덕을 베푸는 일종의 덕담이다. 청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처럼 고마운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시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 덕담이 사사로운 사람끼리의 거래로 공정한 경쟁을 해칠 위험이 있고 친분이 있는 사람끼리 이권을 나눠먹는 반사회적인 문화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탁이란 경쟁하는 자리에 불공정한 특권을 행사하는 일이 아닌가. 미국사람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한국인들의 자식에 대한 집착이라는 말이 아직 유효한가 모르겠다. 열린사회, 무한경쟁, 세계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페미니즘 등 한국의 자식사랑의 정서와 상반되는 새로운 문화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에 자식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이 얼마나 지속될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가장 경쟁적이고 가장 세계적인 한국의 대기업들의 자식에 대한 집착이라든지 가장 사회적인 김일성의 자식에 대한 신뢰를 보면 이 시대에도 한국인의 자식사랑이 만만치 않은 문화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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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2006.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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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광주비엔날레의 국제화 강원구 회장 광주비엔날레가 ‘열풍변주곡’이란 이름으로 65일간의 막을 내렸다. 그 기간동안 관람자가 70만 명에 이르렀으며, 외국인 관람객도 3만 명이나 되었다. 외국인들은 특별히 광주비엔날레를 보기 위해서보다는 한국에 살고 있거나, 잠깐 광주에 들렸다 보게 된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이 광주를 방문하게 되어 비엔날레를 함께 관람한 적이 있다. 그들이 관람하면서 느낀 것은 ‘이것이 바로 비엔날레구나. 한번은 볼만하다’라고 말한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비엔날레만 보기 위해서 광주에 올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보면, ‘지나가는 길에 한번 볼 수는 있어도, 특별히 이것을 보기 위해 오지는 않겠다’ 라는 대답이었다. 중국 상해(上海)에도 비엔날레가 개최되고 있다. 중국에서 비엔날레를 ‘쌍년전(雙年展)’이라 하지만, 그들은 비엔날레란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번 비엔날레는 6차에 걸쳐 개최하다보니 외형적으로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관람객 수가 예상보다 많았고, 총수익도 46억원을 기록했으니 잘 한 일이며, 비엔날레가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를 강조해 아시아인의 눈으로 세계 현대미술을 재조명, 아시아 미술의 위상을 확인한 계기도 되었다.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담은 작품 전시를 통해 아시아의 대표적 미술축제로서 입지를 굳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객이 너무나 적다. 외국인 유치를 위해서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을 유치해야 한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광주비엔날레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 거의 ‘광주미술전’으로 소개한다. 비엔날레란 말이 한자(漢字)로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이지만, 미술전이라 하면 너무나 작은 생각이 든다. 광주비엔날레가 국제적인 문화상품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근 상해나 싱가포르, 부산 비엔날레를 비롯한 다른 지역 비엔날레와 차별화된 경쟁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상해나 싱가포르는 국제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바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고, 부산비엔날레 역시 국제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광주비엔날레를 앞서 간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광주는 아직 국제도시로 성장하지 못했으며, 광주작가들이 비엔날레를 통해 데뷔하는 것도 없었다. 외형적으로 자리를 굳힌 것은 사실이지만, 광주비엔날레는 국제화에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광주의 국제선 취항은 상해 1곳에 불과하지만, 부산의 경우 30여 곳의 국제선이 취항하고 있다. 상해와 싱가포르의 경우 세계 200여 도시로 취항하고 있는 것을 보면 광주와는 게임이 안 된다. 외국인 관람객이 3만명에 이른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보면 만족할 지 모르지만, 국제적인 시야에서 보면 우리 식구들만의 잔치에 불과하다. 외국 관람객들이 비엔날레가 볼만하지만, 특별히 돈을 주고 오지 않겠다는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부러 이곳에 오지 않더라도, 광주에 올 수 있는 하늘 길이 있다면 올 수 있다는 뜻이다. 국제경쟁력 있는 비엔날레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간만이라도 일본과 중국에 전세기를 취항시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야 광주가 국제적으로 알려지며, 경쟁력 있는 비엔날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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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2006.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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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에 첫눈이 내렸다. 어느새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도 지나갔다. 필자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김남주 시인의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라는 시를 떠올리곤 한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황량한 대지에 서리가 내리는 이 무렵, 까치밥으로 홍시 하나를 남겨둘 줄 알았던 우리 선조들의 따뜻하고 정감어린 마음과 자연과도 함께 나눌 줄 아는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시다. 자연을 위한 마음이 이와 같을진대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 선인들의 나눔과 베품의 미학은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상들의 나눔형태 중 ‘마당쓸이’와 ‘배장’이라는 것이 있다. ‘마당쓸이’란 양식이 떨어진 사람이 먼동이 트기 전에 부잣집을 찾아서 그 집 마당을 쓸어 놓고 돌아오면 집주인이 머슴으로 하여금 누가 마당을 쓸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해 곡식을 나누어 주는 풍습을 말한다. 또 ‘배장’이란 시골에서 돈을 모아서 돼지를 잡으면 살코기는 돈을 낸 사람들이 나누어 갖지만 내장 등 나머지 것들은 가져가지 못하고 마을에 사는 환갑 지난 노인들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이다. 비단 돼지뿐만 아니라 노루나 멧돼지 같은 산짐승의 경우에도 내장만은 노인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필자는 이런 선인들의 베품과 나눔의 미풍양속을 기업문화로 계승하고 한 발 더 나아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싶다. 최근 사회는 기업에게 질 좋은 제품과 일자리 제공이라는 본연의 임무 이외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기업은 이미지 제고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회공헌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 구성원들의 자원봉사 활동 또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에 근간이 되고 있다. 이처럼 사회봉사가 기업 사회공헌활동의 주요한 축이 되면서 각 기업들이 자원봉사의 활성화를 위해 각종 사내조직을 정비하고 사회봉사 휴가제도, 표창제도, 등록제 등의 촉진제도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광주도시철도공사도 기존의 나눔활동 등을 체계화해 본격적인 사회공헌활동에 나서고 있다. 설립 초창기부터 개인 또는 각 부서별로 실시해 오던 것을 지역사회에 맞는 맞춤형, 테마별 봉사활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메트로 나누미’라는 사회봉사단을 정식 출범시켰다. 사회봉사단체로 등록된 ‘메트로 나누미’는 1부서 1봉사단으로 구성, 분기 1회 이상 사회복지시설 등을 방문해 목욕, 청소, 세탁, 환경정리, 말벗 해드리기, 시설물 수리 등 공공부문의 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인적·물적·기술적 지원을 하고 있다. 아울러 직원 연수시 사회시설 봉사활동을 의무화하는 등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봉사활동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지역사회에 나눔과 베품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공사 임직원들의 작은 노력들이 새로운 기업문화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업의 사회봉사활동이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의 공감대 형성과 자긍심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분위기가 가장 중요하다. 또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업별로 특성화된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봉사활동 프로그램의 개발과 사회공헌활동 관련 조직의 활용, 기업간 또는 자치단체와 네트워크를 구축해 공동으로 봉사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우리네 미풍양속 계승의 아름다운 가교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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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2006.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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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문화가 代案임은 틀림없으나… 전남도가 남악신도시 내에 국립미술관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말로 그게 남악신도시에 들어선다면 전남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립미술관을 유치한 광역자치단체가 된다. 전남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과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한국 전통회화의 산실로 일컬어져왔다. 소치(小癡), 미산(米山), 남농(南農), 의재(毅齋) 등 기라성같은 대가들이 수없이 배출된, 말 그대로 예향(藝鄕)이다. 그래서 도는 국립미술관 유치를 통해 예향 전남의 전통을 계승해보겠다는 것이다. 또 대내외에 예술의 본고장임을 뚜렷하게 확인시켜 나가고 한국 미술발전도 주도해 보겠다는 포부다. 전남도의 이러한 야심(?)은 일단 방향만큼은 제대로 설정한 것 같다. 문화가 정치의 새로운 대안(代案)이 되고 있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어디 정치뿐이랴. 분쟁과 갈등, 그리고 저개발과 소외의 대안으로 문화가 급부상하는 게 작금의 추세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빌바오의 기적’이다.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자치주의 해안도시다. 15세기 이래로 우중충한 공업도시였다. 지난 80년대 이후 빌바오의 철강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게다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로 10년 가까이 고통을 겪기도 했다. 침체와 불안 속에서 회생방법을 제시한 것은 바스크 정부였다. 지난 91년 그들은 문화산업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빌바오시의 선조들은 문화와 거리가 멀었다. 전통문화를 팔아 엄청난 관광수익을 올리는 유럽의 다른 도시와는 처지가 달랐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세계 사립미술관의 최고봉인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 유치였다. 그리고 조선소가 빠져나간 빈 자리에 6년뒤 미술관을 완공했다. 콘테이너 하치장으로 쓰이던 네르비온 강가는 문화의 요람으로 재탄생했다. 때맞춰 98년엔 바스크 분리주의자들도 테러중단을 선언했다. 빌바오는 말 그대로 거듭났다. 개관 후 1년간 관람객은 당초 예상했던 45만명을 훌쩍 넘어 무려 136만명에 달했다. 이들의 소비규모는 1억6천만달러였다. 사례는 또 있다. 중동의 불안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지금 ‘아부다비 프로젝트’가 떠오르고 있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페르시아만에 문화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의 사디야트섬에 뉴욕 맨해튼의 반만한 크기로 문화지구가 자리잡게 된다. 이 거대한 문화도시를 디자인하는 사람도 공교롭게 미국 구겐하임 재단의 토마스 크렌스 관장이다. 여기 들어서는 미술관은 빌바오의 그것보다 큰 95m 높이다. 이밖에 고미술관, 공연장, 국립박물관과 해양박물관들이 세계적 건축가들의 손으로 설계된다. 소프트웨어도 만만치 않다. 베니스 비엔날레 아부다비라든지 바젤 아트페어 아부다비 등 세계적 예술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크렌스 관장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이곳에 세계 예술이 모이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다. 남도에 국립 미술관이 자리잡는 것도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 지역의 조상님들은 빌바오의 선조들보다 훨씬 막대한 문화적 유산과 유전자를 남겨 놓았다. 풍광의 수려함이나 동아시아의 요충지라는 점에선 아부다비의 지정학적 위치도 부럽지 않다. 따라서 그 간의 소외와 낙후를 문화로 돌파하려는 전남의 구상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너무 안이한 접근이 문제다. 성장 동력과 비전 제시에 대한 치열한 의식이 엿보이질 않는다. 겨우 1만여평의 부지에 땅값 100억원과 건립비 500억원 등 모두 600억원의 사업비 규모로 승부를 걸고 나선 게 도무지 마뜩찮다. 이 정도로 예술의 본향임을 대내외에 알리고 한국미술을 주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화적 랜드마크로 지역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어찌 간단히 이뤄지겠는가. 역량있는 리더십과 거대한 꿈을 이루려는 발상, 그리고 지역민의 공감대 형성이 없으면 이는 또 다른 허세의 시작일 뿐임을 모두가 명심해야 된다.
칼럼
최혁
2006.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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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시론] 관광컨텐츠, 결국 스토리텔링에 있다 한강희 한국관광공사(KTO)가 주최하고 문화관광부·서울특별시·한국관광학회·한국여행업협회·한국관광협의회중앙회 등이 후원하는 제1회 관광스토리텔링 공모전 심사에 참여했다. 스토리텔링이란 원래 ‘독자를 대상으로 이야기가 있는 구조로 말하기’라는 뜻으로 문학에서 기원했지만, 최근 들어 만화·애니메이션·산업디자인·영화·드라마·게임 등 문화 산업 전 분야에 서사(narrative)라는 컨텍스트에 감성과 꿈이라는 의장을 입혀 향수자에 다가서는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연히 상품의 셀링포인트를 형성하는 한 요소로서 광고와 홍보를 비롯한 기업체의 마케팅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관광컨텐츠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문화관광부문에서 스토리텔링은 문화 유산 및 관광 상품의 가치지향 요소를 발굴해 의미를 부여, 관광 요소간(mix) 확대재생산에 기여하리라는 믿음을 주최측이 시의적절하게 간파한 것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첫 회이니만큼 대학 관련 학과, 지자체 관련 부서, 중앙 및 지방지 등에 대대적인 홍보는 물론이고, 대학부·일반부·대상·금상·은상·동상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시상품도 푸짐하게 내걸었다. 응모 현황을 살펴보면 일단 성공적이라 평가할만하다. 한류 관광지 22건, 국내 주요관광지 62건, 세계문화유산유적지 26건 등 총 147명, 110건이 응모됐다. 대학부가 63건으로 일반인 47건보다 다소 앞섰다. 우리 지역의 경우 화순 운주사와 천불천탑, 진도 바닷길, 담양 소쇄원, 화순 고인돌 공원, 강진 대구 청자 도요지, 영암 구림마을 전설 등 몇몇 편에 불과해 ‘문화관광’이라는 시·도정 캐치프레이즈를 무색케 했다. 특히 남해안 거북선 크루즈·서대문 형무소·장승 공원·판문점 등을 명소로 만들어 보자는 참신한 제안도 나왔다. 심사는 스토리텔링 공모전에 걸맞게 해당 관광 상품(관광지)을 외래 관광객에게 참신하게 보여주고 브랜드적 가능성을 타진해 관광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 이 상품이 지속 가능한 성장 잠재력이 있는지, 그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스토리보드를 구성할 것인지, 인근 지역의 관광 상품과 시너지를 도모할 수 있는지, 해당 상품의 스토리텔링이 사실을 기초로 흥미성과 창의성을 부여하고 있는지, 관광 가이드 해설에 효율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에 관해 이뤄졌다. 응모 편수에 비해 내용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다수 응모자들은 인터넷이나 해당 지자체 홈페이지에서 해당 관광지에 관한 정보를 날 것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었다. 대학부의 경우 특정 과목의 리포트나 학기 논문(term-paper)적 성격이 짙었고, 일반부의 경우 지역 관광 안내 및 홍보에 주력한 내용이 많았다. 요컨대 가장 초점이 돼야 할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아예 스토리텔링 기법이 차용되지 않은 제안서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토리텔링은 거대한 이야기도, 진지한 담론도, 완전 허구의 가공된 이야기도, 난해하고 경직된 이야기도, 정확성을 근거로 장시간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의 관광적 접근은 해당 매력물과 관련된 기초 사료에 흥미적 요소를 부가해 감성어필하는 데 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이유 있는 입담,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명장면을 가체험하는 ‘진실의 입’을 떠올리면 된다. 수원 화성·경주 불국사·고인돌 공원을 전체로 삼아 강연 원고나 소설을 쓰는 데 있지 않다. 관광 매력물을 가장 효율적이고 흥미롭게 보여주는 투어리즘 컨텐츠를 작성하는 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이다. 한 두 문장, 혹은 수개의 문장이 연쇄된 형태일 수 있고, 이 문장들을 복합적으로 구성하면 가능하다. 관광 매력물의 이미지를 관광객의 눈앞에 선명히 제시할 수 있다면 스토리텔링의 얼개가 잘 갖춰진 것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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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국화야 너는 어이…’ 50년대 전쟁이 끝나고 사르트르나 까뮤의 실존주의 사상이 젊은 지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을 때 명동이나 충무로 등 보애미양이 살던 거리는 이브 몽탕의 샹송 ‘고엽’이나 나나무스쿠리의 ‘사랑의 기쁨’의 나직하고 구슬픈 목소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오 나는 그리워하네. 삶은 즐거웠고 태양은 빛났던 그 옛날을’. 이브 몽탕의 애상에 젖은 세리프로 시작하는 ‘고엽’이나 .’사랑의 기쁨은 다만 한동안 일 뿐 사랑의 슬픔은 끝이 없네’의 프랑스 샹송 특유의 애수, 즉 전후의 세라비 (C‘est la vie)의 덧없음과 체념의 노래들이었다. 이 무렵 나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지만은 대학이 4년이나 늦은 ‘늙은 학생’이라 전공 공부도 힘들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그 때 불문학과가 없었고 주변에 무엇인가 아는 채 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은 너무 어려운 말들이라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하루는 혜화동 어느 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식당 입구에 ‘손오성 교수 출판 기념회’라는 안내를 보게 되었다. 이름 있는 불문학자로 더러 그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 실존주의 사상에 대해 귀동냥이나 할까하고 불청객이 거길 들어섰다. 10여명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 둘러쌓인 조용한 분위기 속에 시골 아저씨같이 생긴 손 교수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야기 하면서 일행들에게 일일이 전쟁을 어떻게 겪었는가 하고 물었다. 전쟁을 겪는 동안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벼웠고 또 소중한가 실감하지 않았는가 물었다. 죽고 또는 살고 하는 부조리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인생을 보다 더 절박하게 생각하기 마련이 아닌가. 실존주의 사상은 죽고 사는 일이 절박한 전쟁속에서 생긴 반전사상이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저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꺄뮤의 말도 소개했다. 북진 통일에 토를 달면 빨갱이이던 시대라 말이 조심스러웠다. 나는 지금 나의 회상 속에서 그 소박한 손 교수의 출판기념회가 얼마나 크게 남아 있는가 말하고 싶다. 큰 사람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든다. 그 모임이 나는 소박하지만 큰 모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 주말 그 손 교수의 출판 기념회를 회상시키는 모임에 초대됐다. 한시집 (漢詩集) 출판기념회였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오랜만에 한시 (漢詩) 시창(詩唱)을 들었다. 이 시대 더구나 광주에서 한시의 시창을 듣는 것은 희한한 경험이다. 그러나 나를 감동시킨 것은 시창이기 보다 그날의 주인공이 창한 시조였다. 그의 시조창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의 평시조 가락에서 나는 오랜만에 잃어버린 감동을 만났다.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고 끝을 맺었을 때 나는 눈시울이 뜨거운 것을 느꼈다. 1948년 늦은 가을 나는 한 달 반 동안 광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적이 있다. 여순사건때였다. 그 감방에서 나는 시조창을 배웠다. 평시조 였는데 그 하나가 ‘국화야 너는 어이’이고 또 하나는 ‘간밤에 부던 바람’ 이었는데 나에게 시조창을 가르친 사람은 지금 그 이름을 잊었지만 금도와 격을 느끼게 한 과묵한 사람으로 누군가 광주 고보 대선배라고 소개했다. 여순 사건으로 다른 수감자와 같이 예비 검속된 사람으로 모두 그에게 선생님, 선생님하고 존경을 표했다. 뒤에 나는 학교당국의 주선 등 주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지만은 그분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오랜 가뭄 때문에 무등산도 올해 단풍은 볼품이 없다. 그러나 지난 주말 나는 우연히 희한한 단풍을 발견했다. 중머리재에서 봉황대로 오자면 너덜겅이 있는데 그 한 가운데 왼쪽으로 바위 속에서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지난밤 시조창의 감동과 옛날 유치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상기했다. 붉고 노랗고 푸르고 다갈색의 화려한 단풍 속에 나에게 시조를 가르쳐 준 그 사람의 뚜렷한 목소리가 있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칼럼
남도일보
2006.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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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연변에는 ‘옌볜대학’이 없다 강원구 중국과 수교되기 전에 우리는 중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우리 음으로 읽었다. ‘마오저뚱,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은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으로 불렀다. 수교 후에도 얼마동안 우리 음으로 불렀으며, 홍콩 옆의 심천은 한자음이 심수이지만 중국어 발음이 ‘선쩐’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국무회의에서 심천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동북공정이나 역사왜곡에 대해 중국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 요즈음 언론의 보도를 보면 중국의 인명, 지명을 한자음으로 읽지 않고, 원음으로 읽어 연변조선족자치주인 연변을 ‘옌볜’, 연길을 ‘옌지’, 선구자들이 많이 살았던 용정을 ‘룽징’, 고구려 수도였던 환인과 집안을 ‘환런, 지안’으로 표기하고 있다. 윤봉길의사의 혼이 담겨있는 상해 홍구공원을 ‘훙커우공원’으로, 북경의 천안문을 ‘톈안먼’, 이화원을 ‘이허위엔’으로 표기하고 있다. 연변대학 교문에 한글로 ‘연변대학’과 한자로 ‘延邊大學’ 이라 써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에서는 ‘옌볜대학’으로만 표기하고 있는데, 과연 이 것이 옳은가 생각해볼 일이다. 중국동포들은 “한국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연변을 옌볜이라 말하는가. 왜 우리 조선족을 중국 사람으로 몰아가는가”라고 반문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발행하는 신분증에도 우리 한자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우리 음과 중국 음 두 가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언론에서 우리 음은 전혀 쓰이질 않고 있으니 문제다. 전 국가주석 강택민(江澤民)은 ‘장저민’보다 ‘쨩쩌민’에 가깝고, 북경(北京)은 ‘베이징’보다 ‘뻬이찡’에 가까우며,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계림(桂林)은 ‘구이린’이 아니라 ‘꿰이린’에 가깝다. 우리는 된소리와 중모음을 쓰지 않기로 되어 있어 ‘쨩(江)’의 경우 ‘장’으로 쓰게 되면 장(張)과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화교들은 ‘천수이볜’을 ‘진수편’으로 말하며,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후진타오’를 ‘호금도’로 부르고 있다. 얼마 전 길림성 장춘시장을 만났는데, 그의 이름은 ‘쭈예찡(祝業精)’이다. 그런데 그는 ‘축업정’이라는 한글 명함을 갖고 소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한자와 중국어는 같은 것이 많지만 전혀 다른 것도 많다. 자동차를 기차(汽車), 기차를 화차(火車), 식당(食堂)을 찬청(餐廳), 물건(物件)을 동서(東西), 화장실을 측소(厠所)·세수간(洗手間), 공항(空港)을 기장(機場), 경기장(競技場)을 체육장(體育場), 세관(稅關)을 해관(海關)으로 표기한다. 경기장(競技場)을 체육장(體育場)으로 표기한다던가, 화장실(化粧室)을 세수간(洗手間)으로 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 우리 식의 한자를 표기하여도 중국인들은 얼마든지 알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도로에 중국의 간체자가 아닌 우리의 한자로 표기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목포시내의 거리를 보면 중국식 간체자 표기되어 있어 한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공항이라던가 부두 등 특정한 지역에서 여행객을 위해 어느 정도 쓰는 것은 좋지만, 도로 표지판에 간체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중국도 국제화시대 자기들만의 한자를 사용하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명함에 약자보다는 정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발음을 정확히 기록한다 하더라도 중국어 발음은 표기하기 힘들다. 중국이 대전(大田)을 ‘따톈’, 대구(大邱)를 ‘따치우’로 발음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루우셴’으로 말한다. 중국이 우리 음으로 읽지 않는 한 우리도 우리 음으로 읽는 것이 형평성에 맞을 것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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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세평]‘희망전남’ 비전한방을 꿈꾸며 박혜자 전남도 복지여성국장 우리 전남은 전국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고 특히 가을에 내리 쬐는 태양볕이 강렬해 탐스런 열매를 맺게 할 천혜의 환경여건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적당한 염분과 습기가 혼합된 갯바람이 지나치는 해안가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자라나는 식물들 중엔 우리 몸을 보해주고 치료해주는 천금같은 한약재들이 많다. 그래서 이들 한약재의 이름 앞엔 갯방풍, 갯쑥, 갯시호, 갯패랭이, 갯기름나물, 갯질경, 갯금불초 등 ‘갯’이란 특별한 접두어가 붙는다. 우리 도내에는 이러한 우수한 한약재들을 길러내는 농가수가 7천여호에 이르고 연간 생산량도 4천700여톤이나 되며 생산 농가수나 생산량 모두 경북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우수한 한약재들은 서울, 대구, 경북, 충청, 심지어 전북의 주소가 인쇄된 포장지 안에 담겨 한의원이나 한약방에 유통되고 있다 우리 도에서 생산된 한약재가 남의 동네 포장지에 담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약재성분을 그대로 유지시킬 저온 창고가 없어 품질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하기 전에 팔아야 하고 그러려니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에 처분하는 게 다반사며 수요가 조금 뜸하거나 과잉생산이 되면 그 해 농사를 손바닥만 쳐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반면에 소비자입장에서는 한약재의 품질이 인증되지 않아 마음 놓고 먹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도에서는 정성을 다해 재배한 한약재가 제값을 받고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방산업육성을 도의 역점사업으로 정하고 이를 내실있게 추진하기 위해 작년 7월 전국에서 최초로 도에 보건한방과를 설치하고 한방의료계를 신설했다. 그러나 우리도의 한방산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약령시로 널리 알려져 우리나라 한약재 유통시장의 중심역할을 했던 대구, 경북에서는 지역한방산업육성을 위한 종합계획을 2000년대 초에 수립하였는데 경북지역에서는 주로 한약재 재배, 한약자원개발, 품질인증 및 생산가공분야에 관한 사업을, 대구에서는 한약재 연구와 유통분야에 관한 사업을 하기로 공동협의하고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약 325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충남에서도 금산 인삼을 대표상품으로 내걸고 한방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강원, 경남, 전북지역도 각자 지역의 한방사업 활성화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우리 도에서는 작년에야 우리지역 실정에 맞는 한방산업 육성방안을 마련하였고 금년 9월에는 장흥군 안양면 등 3개 지역 300만평에 정남진 생약초 한방특구를 지정 받아 한방사업을 본격 추진할 채비를 갖추어 가고 있다. 한방특구내에는 전남의 한방산업을 총괄 기획조정하고 한약자원연구, 한약재 품질인증시스템을 갖춘 한방산업진흥원을 건립하고 생약초 재배단지조성, 사상의학 체험랜드, 아토피치료센터 등을 만들어 한방웰빙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또한 화순읍 내평리 지역에 5천톤 규모의 한약재를 일시 저장하고 유통관리할 수 있는 대규모 우수 한약재 유통시설을 100억원의 예산을 투입, 건립준비를 서두르고 있고 황칠나무, 뱀독 등 천연자원을 산업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부지런히 타는 불은 빨리 꺼진다” “바쁠수록 돌아서 가라”라는 속담도 있다 먼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우고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면서 차분하게 한약 재배 농가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되새김하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도의 한방사업의 출발은 타 지자체에 비해 늦긴 했지만 타 지역의 시행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지역에서만 할 수 있는 블루오션을 찾아 내는 것이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칼럼
남도일보
2006.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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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公庫를 절약하는 者, 드물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목민관의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를 밝힌 책이다. 그는 율기육조(律己六條) 가운데 제5조 절용(節用)에서 다음과 같이 타이르고 있다’. ‘…사용(私用)의 절약은 보통 사람도 할 수있으나 공고(公庫)를 절약하는 자(者)는 드물다. 공물을 내 것처럼 아껴야 어진 목민관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을(지방자치단체)에는 공용의 재산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그냥 두고만 보지 않았던 것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처음엔 공용으로 설립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 용도의 지출이 이뤄졌다. 그러다 보면 그릇된 관례가 겹겹이 생기고 절제없이 낭비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재정이 바닥나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세월은 흘렀어도 공용의 창고를 제 집 곳간처럼 드나들기는 마찬가지다. 꾀는 더 늘고 교묘해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항시 눈에 거슬리는 게 의원들의 외유(外遊)다. 국회의원이고 지방의원이고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예산을 털어 해외여행에 나서기 일쑤다. 물론 해외연수라든지 국제교류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뒤집어쓰고 나간다. 그러나 허울은 허울일 뿐이다. 쓴 돈만큼 효과를 봤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시민단체들이 의정의 폐해를 지목할 때마다 이 해외연수는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이러한 작태들은 굳이 멀리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지난 번에 임기가 끝난 전국 250개 지방의회가 4년간 ‘연수(硏修)’라는 미명아래 해외 관광지를 돌아다니면서 낭비한 혈세가 203억원이다. 의원 1인당 480만원 꼴이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등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얻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억울하다는 정치인이 있을까봐 흥사단측은 ‘연수목적 부합비율’이라는 나름대로의 기준도 마련했다. 연수 취지대로 사회복지시설이나 교육기관, 의회 등 공공기관에서 보낸 시간과 전체 외국체류 시간의 비율을 따진 것이다. 그랬더니 지방의회 전체의 부합비율은 불과 16.4%에 그쳤다. 광역의회 중에서는 광주시의회가 5.7%로 가장 낮았다. 광주시 의원들은 해외연수 기간의 90% 이상을 관광성 외유로 채운 셈이다. 더 부끄러운 기록도 있다. 보성군의 경우엔 부합비율이 아예 0%로 집계됐다. 무안, 담양, 고흥, 화순 등의 군의회도 ‘오십보 백보(五十步 百步)’였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아니한 감동이나 의외의 신선한 충격을 접하기도 하는 법이다. 다산조차 한탄했음에도 이 걍팍한 세월에 ‘公庫’를 절약하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마치 천연기념물이 다시 돌아온 듯 반갑다. 광주시 교육위원회가 파탄 위기에 놓인 교육재정 타개에 모범을 보이기로 결정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최근 지난해 예산에 편성된 위원 해외연수비 1천600만원 전액을 반납키로 의결했다고 한다. 아울러 내용 연한이 지나 내년에 교체할 예정이었던 관용차량 구입비 5천500만원과 내년 해외연수비 2천만원도 취소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절감된 예산은 9천여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사실 광주시 교육청의 재정난은 심각하다. 광주 지역 24개 학교의 강당과 급식실 공사가 중단되고 있을 정도다. 제대로 따지면 교사들의 월급도 다 지불하지 못할 형편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아래 교육위원들이 앞장서 교육재정 확보에 적극 동참하기로 합의한 것은 여러 모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없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은 교육위원들의 이같은 시도를 폄하하고 시기하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뭐 꼭 그게 누군지를 밝히려 들 필요도 없어 보인다. 국가나 지자체의 돈이라면 마냥 공짜처럼 여기고 먼저 챙기지 않아 남이 가져가면 손해라도 본듯이 펼쩍 뛰는 사람들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니 정치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중앙이 됐든 지방이 됐든 ‘선량(選良)’들께선 제발 교육 선량들의 조그마한 시도를 거울삼아 줬으면 좋겠다.
칼럼
최혁
2006.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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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시론] 지역정착형 세계지향 고령자의 길 형광석 교수 이제 제법 가을이 느껴진다. 수 십 년 만에 찾아온 10월의 낮 뜨거움도 11월이 되자 점차 약해지고 있다. 대낮의 볕이 있어도 그렇게 따갑지 않게 느껴진다. 낮 시간이 선선할 때도 있다. 기분 좋은 햇살도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약간 움츠러질 정도로 쌀쌀하다. 밤에는 가볍게라도 방에 불을 넣어야 잠자리가 편하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이렇게 좋은 가을에 사람들은 책을 찾기도 하고 산과 들로 가기도 한다. 그동안 머릿속에 새겨진 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책을 한 권이라도 아니 한 페이지라도 읽지 않으면 멋쩍어지는 가을. 눈으로 읽어 머릿속을 채워 올바름을 다잡는다. 산과 들을 찾음은 대자연의 순환의 이치를 일깨우고 겨우내 버틸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올바른 생각도 건강한 신체에 깃들고 자란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눈과 마음으로 책을 읽고, 몸과 마음으로 산과 들을 찾음은 모두 개개인의 경쟁적 능력을 기르는 방편의 하나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고령자의 세상이다. 그 숫자가 그렇다. 65세 이상 노인이 전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고령자여서 사회적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사물의 양이 많아지면 그 질이 변하듯이, 고령자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커다란 실체가 되어가고 있다. 한편 갈수록 졸아드는 지방. 지방의 주민이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해도 서울의 소형 아파트라도 사기는커녕 전세금도 채 안 되는 세상. 지방에서 서울로, 한국에서의 성공(Korean Dream)을 꿈꾸고 세계 각지에서 서울로 몰리다 보니 그럴 것이다. 집 한 칸 마련할 돈은 없을지라도 장래를 보고 일자리를 보고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간다. 젊은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노인들마저 서울로 가고 있다. 서울러시(Seoul Rush)의 형국이다.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많아지고 있는 지방. 고령자마저 자기의 오랜 둥지를 떠나는 세상. 그래도 지방은 존재하고 영속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방의 고령자는 지역정착형 세계지향 고령자(the locally oriented global older)가 되어야 한다. 전국에서 고령자가 가장 많은 광주·전남은 더욱 그래야 한다.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사명감과 더불어 지방의 고령자는 자신의 능력을 유지하고 창출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키우려면 많이 읽고 많이 들어야 한다. 읽고 들으려면 눈과 귀가 밝아야 한다. 그런데 눈은 40대 중반 무렵부터 노안의 증상을 드러낸다. 예전과 달리 글을 읽어도 글자가 눈 속에 사진으로 박히지 않는다. 머릿속에 잘 새겨지지도 않는다. 눈은 멀어져도 귀는 여전히 밝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것이 청력이란다.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이 없어 보여도 다 듣는다고 한다. 언젠가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 있는 80대의 할머니를 딸로 보이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간호하면서 항상 덕담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미인인 우리 어머니! 사랑이 많은 어머니! 몸 좀 움직여보실까요?” 혹여 혼수상태에 있는 분을 문병하거나 간호할 때에는 반드시 덕담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의 마음이 상처를 입는다. 고령자는 읽음보다 들음으로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고령자일수록 하루하루 시간표를 짜서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하다고 한다. 요즘 분야별로 많이 하고 있는 포럼행사나 강연회의 참여를 시간표에 넣는 것은 필수이다. 책을 읽기에는 상당히 효율이 떨어지므로 읽어주는 책을 활용해야 한다. 이른바 오디오북의 활용이다. 새로운 내용을 듣고 취사선택하고 실천하는 습관의 형성이다. 세 살적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 많이 들어서 실천하는 습관의 형성은 고령자로서의 삶의 성공을 보증하는 요체이다. 광주·전남의 고령자는 지역정착형 세계지향 고령자로서 거듭나야 한다. 그러려면 청력을 활용한 고령자 능력의 유지와 창출이 필요하다. 그리고 광주·전남의 지방정부, 교육당국자와 대학에서는 고령자의 평생학습조건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고령친화적 일자리는 물론이다. 이제 광주·전남의 미래는 고령자가 좌우한다.
칼럼
남도일보
2006.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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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쾌도난마가 그리운 대학 강단’ 마가복음에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헤로드 왕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 피립의 아내 헤러디어스와 결혼했다. 반대한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이 있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전생이 성자로 환생한 사람이라는 풍설을 몰고 다니는 명성이 높은 세례자였다. 해로드 왕은 그를 구금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이 바르기 때문에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왕의 아내 헤러디어스 생각은 달랐다. 집요하게 요한의 죽음을 원했다. 헤러디어스의 딸은 미인이었다. 왕의 생일잔치 날 왕은 미모의 의부 딸로 하여금 축하의 자리에 춤을 추게 하였다. 그 미모와 춤에 눈이 먼 왕은 실수를 한다. ‘그대 소원이 무엇인고. 만약 그대가 원한다면 나라의 반이라도 아끼지 않으리라’. 미녀는 어머니와 상의하여 소원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다. 문무백관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라 왕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요한의 목은 잘려 접시에 놓인 채 진상되었다. 요한의 목 이야기는 마가복음 말고도 마태복음에도 나온다. 쉽게 잊기에는 사건이 너무 흥미로운 것이다. 그래서 요한의 목은 많은 작품에 인용되었다. 가령 T.S. 엘리엇의 초기 작품 ‘프르푸록의 연가’에도 나온다. 잡념이 많고 비겁한 중년의 지성인 프르푸록은 혼자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그는 자기의 목이 접시위에 놓인 채 운반되는 착각을 하였다. 자기가 선지자로 희생되는 착각을 한 것이다. 착각이란 아름다운 심리현상이다. 최근 나는 만해 한용운의 한시를 읽으면서 그 착각현상을 경험하였다. 만해의 한시 가운데 특히 그가 절라도 여행을 하면서 지은 시를 읽으면 나도 착각 속에서 만해가 된다. 만해의 전라도 시속에는 ‘약사암 (무등산) 가는 길( 藥師庵 途中)’, ‘영산포 배 안에서 (榮山浦 舟中). ‘화엄사 산책(華嚴寺 散步)‘, ’선암사에서 앓고 난 후에(仙巖寺‘病 後作)’ 등이 있다. 한시 속에 만해는 ‘임의 침묵’ 같은 모호한 상징의 세계도 없고 기미 독립 선언서의 결연한 의지도 없다. 다만 하나의 나그네에 불과하다. 나는 나그네로서의 만해 한용운을 사랑한다. 가령 선암사의 시에 ‘나그네 떠돌다 보니 남쪽 땅의 끝에 왔다/ 며칠 앓고 일어나 어느새 가을바람을 맞는다./ 언제나 천리 길은 혼자 이고나 / 그러나 혼자 가는 길이 오히려 정이 깊나’. 그 동안 만해 같은 큰 시인은 정직한 이야기가 별로 정이 안 갔다. 작크 데리다의 해체론 식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만해는 타자이었다. ‘만해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해체론의 심층에는 막 먹는 정서가 깔려 있다. 내가 해체론에 관심이 가는 것은 나도 속으로는 막 먹는 시대가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해는 막 먹기에는 너무 크다. 그래서 정이 안 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만해가 좋은 것은 그의 전라도 시를 통하여 내가 그의 나그네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참 만해의 착각을 즐기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자기는 목포 대학 허형만 교수의 학생인데 현대시 특강 시간에 교수가 선정한 시인에 대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어 그 일로 나를 만나고 싶다는 요지였다. 나는 만해의 착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젊은이의 접근이 싫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가 보는 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는 세례 요한처럼 내가 목이 잘린 모습이 있었다. 학생을 만났을 때 나는 그 발표의 자리에 참석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은 지도교수와 의논하고 승낙을 받아냈다. 나는 내가 요한의 목처럼 잘려 이 부위 저 부위가 해부되는 현장을 착각 속에서 보았다. 자학증이다. 예술은 자학증의 소산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학증인 나의 예술론에서 나의 작품은 산산 조각이 나야 한다. 50년대 이어령은 서울대학에 저명한 문인들을 초청하여 현장에서 쾌도난마로 신랄하게 비판하여 화재가 된 적이 있다. 나는 대학 강단의 극적인 쾌도난마를 만나고 싶다. 사정없이 잘려나가야 한다. 그러나 학생의 발표는 하나의 헌화 사였다.
칼럼
남도일보
2006.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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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최경주가 바다 건너 미국 대륙에서 기쁨의 소식을 전해 왔다. 최경주는 30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베이의 위스틴이닉스브룩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크라이슬러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4언더파 67타를 쳐 4라운드 합계 13언더파 271타로 정상에 올라 아시아 지역골퍼로는 처음으로 PGA 통산 4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최경주의 이번 쾌거는 온 나라가 IMF 환란으로 좌절과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잇따른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정상 등극으로 온 국민에게 희망을 던져주었던 박세리를 떠올리게 한다. ‘바다 이야기‘ 등 각종 비리와 북핵문제, 살아날 줄 모르는 경제로 인해 팍팍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던져주고 있다. 최경주가 완도가 고향인 우리 지역의 아들이기에 그 기쁨은 몇배가 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최경주가 시즌 막판 화려한 우승 세리머니를 펼치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다시 한 번 도약한 원동력은 ‘혁신‘을 꾀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골프계와 그를 지켜본 지인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최경주는 이번 우승 직전까지만 해도 PGA 투어 진출 이후 최악의 시즌을 보내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대회 직전 최경주의 시즌 상금은 131만3천348달러로 순위는 고작 68위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이 ‘톱10‘입상 횟수도 이 대회 직전까지 세차례에 그쳐 지난해(3회)까지 같았지만 그래도 작년에는 한차례 우승에 그쳤기에 ‘한물 같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최경주는 보란듯이 어니 엘스, 등 쟁쟁한 프로골퍼들을 제치고 여유 있게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최경주는 이번 정상 등극으로 그동안의 부진을 훌훌 털어내고 단숨에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시즌 최고상금을 받았던 지난 2002년을 훌쩍 넘어섰고 투어챔피언십과 메르세데스벤츠챔피언십 출전권 확보와 내년 4개 메이저대회 출전권도 획득, 정상등극을 노릴 수 있게 됐다. 최경주의 대회 우승 원동력은 시즌 도중에 모험이나 다름 없는 스윙교정에 착수하고 과감하게 장비를 바꾸는 ‘혁신정신‘에서 비롯됐다. 여기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력과 끊임 없이 자신에 대한 채찍질하는 부단한 의지와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경주는 "좀 더 오래 PGA 무대에서 버티려면 지금 스윙으로는 안 된다"며 "점점 더 파워플한 스윙을 구사하는 선수도 많아지고 코스도 파워 히터에게 유리하고 있다"며 배경을 밝혔다. 이같은 최경주의 변화와 혁신은 지금 거대한 변혁과 혼란의 시점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교훈과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적당주의와 보신주의만으로 일관하는 공직사회, 갖가지 부정과 비리에 노출된 사회지 도층, 민생과 현실을 외면한 채 정쟁과 정권창출에만 집착하는 정치인 등 사회 각계각층에게 진정한 ‘혁신‘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나라 안팎을 둘러싼 거대한 변화의 정점에 서 있다. 이제 나라의 지도층과 국민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혼연일체의 자세로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 변화와 혁신은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짧은 시간에, 어느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 모두의 관심과 참여, 의지와 노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광주.전남지역의 앞날도 이같은 변화와 혁신에 달려 있음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지역과 지역민의 미래는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 등 지역 지도자들의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변화와 혁신에 공감하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역민 모두의 적극적 참여 속에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단체장들의 적절한 리더십과 지도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최경주의 혁신정신을 지역발전의 원동력과 밑거름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포츠레저부장
칼럼
남도일보
2006.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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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69년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37년 동안 두 번에 걸쳐 1년 6개월여의 실업자, 즉 백수생활을 경험했다. 처음 백수생활 6개월은 다음 직장이 보장된 상태여서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두 번째 1년 동안의 백수생활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생활의 연속이었기에 한없이 무료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세월이었다. 공직이나 대기업에 근무하던 친구나 동기생은 물론, 한참 후배들까지 그만두는 형국이었기에 그 때 느꼈던 불안감과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었던 터라 사업할 수 있는 용기도 없고 해서, 새 일터를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못한 상황이었다. 주변에서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좀 쉬지”라는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추하게 보여 손가락질 받는 것은 아닌지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던 차에 나름대로는 눈 높이를 확(?) 낮춰 중소기업에 자리를 얻었는데 고급승용차에 고액연봉 등 공직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는 잘됐다는 격려와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르지 않은 나이에 다시 고향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스스로도 분에 넘치는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고향의 사랑에 보답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자리는 영원해도 사람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잘 아는 터이다. 언젠가는 자연인 즉 백수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보나 주변의 백수들을 보나 공통점은 “현직에 있을 때 참 잘해줬는데, 그만두고 나니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라는 섭섭한 푸념이다. 어찌 자기에게만 그러겠는가. 세상 인심이 다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아파할 일도, 그로 인해 건강을 해칠 일도 아니다. 더욱이 나 자신을 되돌아 보면 쉽게 답을 얻고 편안해 질 수 있다. “내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 퇴임한 후에 나는 과연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던가?”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더욱 현직에 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인연은 퇴직과 동시에 버려야 한다. 현직에 있는 분들은 예비 백수로서 언제든 백수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고 반드시 백수가 된다. 따라서 현직에 있을 때 가능하면 백수입문을 늦출 수 있도록 신명나게 일하고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백수가 되었을 때 혼자만의 삶을 즐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등산과 같은 운동을 하든, 독서를 하든, 인터넷에 빠지든 무엇이든지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 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또한 현직에 있을 때 동창회, 향우회, 각종 친목회나 애경사 등에 소홀하다가 백수가 되어 기웃거리는 것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내모는 지름길이다. 평소에 일반적으로 가장 쉬우면서도 소홀히 하는 것이 가족관계이다. 백수가 되어 집에 들어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자격지심일수도 있지만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받을 눈치, 하루 세끼니 해결하는 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더욱이 방콕하고 있다면 얼마나 삶이 지겹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겠는가? 해결책은 간단하다. 평소 아내와는 가사를 분담하려하고, 자식들과는 대화를 많이 하려 노력하면 자연스레 자상한 남편과 존경받는 아버지가 돼 있을 것이다. 부모 형제와도 마찬가지다. 내가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 있을 때 효도하고, 우애한다면 백수가 되어서도 내 곁에는 든든한 친구가 넘쳐나 삶이 무료할 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모든 것은 현직에 있을 때라는 가정하에서 이다. 다시 말해 현재 직장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현실이다. 백수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직장의 소중함을 뼈져리게 느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을 갖고 있다는 건 가장 큰 축복이고 행운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현재 몸 담고 있는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근무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일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한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예비 백수들이 우선은 백수 입문을 늦출 수 있도록 현직에 최선을 다하고, 아울러 백수 입문후에 대비해서 지금까지 무심했던 주변을 이제부터라도 돌아볼 것을 권유한다. 가장 평범한 진리는 유행가 가사에도 나와 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칼럼
남도일보
2006.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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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 관람객 부풀리기는 이제 그만 여론 매체에 발표된 통계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그 통계치에서 많이 벗어난 사람이려니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이 여러 자료와 통계들로 여론을 조작하리라곤 감히 상상조차 못한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 통계’라는 책이 1954년 출판돼 현재까지도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는 스테디셀러일 정도다. 저자 대럴 허프는 자신의 책을 ‘통계로 사기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종의 입문서’라고까지 주장한다. 사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방송과 언론에서 제시하는 통계수치를 일반인은 믿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정부에서 발표하는 통계엔 신뢰성을 더 갖게 된다. 하지만 경제성장률, 실업률, 소득불평등률 등 정부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조작되는 것도 많다고 한다. 굳이 조작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으나 으례 부풀려 발표되는 게 또 있다. 바로 전국적으로 1천개가 넘는 지방축제의 관람객 숫자다. 웬만하면 100만명이 훌쩍 넘었다는 과잉홍보가 다반사다. 이젠 듣는 사람도 그저 그러려니 하며 웃고 넘긴다. 누가 일일히 세어본 것도 아니니 따져봐야 헛일이다. 그런데 이 관람객 수를 “더 이상 속이지 말자”고 나선 단체장이 있다. 황주홍 강진군수다. 강진은 문광부 지정 최우수 축제로 선정되는 등 이 지역 대표축제인 ‘청자문화제’를 해마다 개최중이다. 나름대로 성공적인 축제로 꼽힌다. 그럴수록 정확한 통계가 필요하다는 게 황군수의 생각이었나 보다. 축제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직한 행정을 해야한다는 차원에서 ‘관람객 부풀리기’는 그만 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올해부터 ‘막고 품는’ 작전으로 나섰다. 지난 14일부터 9일간 열렸던 청자문화제 현장에 계수요원을 배치하고 실사(實査)를 했다. 2인1조의 요원이 축제장 입구 3곳에서 입장하는 관람객 수를 일일이 헤아렸다고 한다. 그 결과 “올해 강진 청자문화제를 찾아준 관광객 수는 정확히 40만128명입니다”라는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지난해 143만명, 2004년 76만명이 허수(虛數)였음을 스스로 자백한 셈이 됐다. 그러나 이 고해성사(?)는 의미가 크다. 앞으로 청자축제를 포함해 강진군의 지방행정은 더 이상 주먹구구라는 비아냥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통계의 정확성은 중요하다. 제대로 된 통계는 우리 사회를 믿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든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박’을 터뜨려주기도 한다. 최근 국내 기업들은 통계를 활용해 잇따라 큰 재미를 봤다. 유행이 급변하고 고객 입맛도 갈수록 까다로워지면서 상품화의 성공 여부가 정교한 소비자 통계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진 탓이다. 통계청이 이를 입증하는 통계를 내놓았다. 최근 잘 팔리는 상품 20여개 가운데 7개가 국가 통계를 활용해 개발됐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여성경제활동참가율, 인구주택총조사, 해외관광여행객수, 인구동태조사 등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통계를 읽고 소비자의 움직임을 사전에 예측해 상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최단기간 1억병 판매 돌파 기록을 세운 D주류의 ‘처음처럼’은 여성 음주율과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급격히 높아졌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사례다. 밥을 전자렌지에 데워 먹는 ‘햇반’의 인기 비결도 소비자 통계 속에 숨어 있었다.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1985년 66만 가구에 불과했던 1인 가구수가 95년 164만 가구로 10년새 2.5배로 늘어난 사실에서 착안됐다고 한다. 이처럼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유익한 게 통계다. 복잡한 숫자놀음이라며 처음부터 겁먹을 일이 아니다. 가을을 맞아 성황을 이뤘던 전국의 축제 행사들이 이제 서서히 막을 내려가고 있다. 모두들 강진군의 솔직한 발표를 거울삼아 정확한 관람객 통계를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칼럼
최혁
2006.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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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시론] 문화立市, 관광立道의 선행조건 한강희 교수 지역자치제가 뿌리내리면서 어느 곳인들 ‘문화와 관광’이 해당 지자체의 슬로건이자 캐치프레이즈 아닌 곳이 없다. 광주-전남 역시 현재 추진 중인 굵직한 사업들이 연착륙할 경우 동북아-환태평양권의 문화관광 허브로 자리매김 될 게 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 ‘프로젝트’들은 국정 현안이자, 시·도정 최우선 과제에 해당하거니와 단순히 지역민과 지역 경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적 감수성만 생각한다면 남도를 빼고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감히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가장 남도적인 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임을 손색없이 대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역 10년 후의 판도를 바꾸게 될 ‘아시아문화중심도시’, ‘J프로젝트’, ‘여수세계박람회’, ’광양만권 물류경제자유구역‘, ’무안 기업도시‘, ’나주 행정혁신도시‘ 등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그까이꺼 대충‘ 이 아니다. 세상사 많은 일들이 경제원칙과 직결되는 바, 언제나 ‘경기순환곡선’에 걸쳐 있다. 저점은 상승점을 지향을 하게 마련이며, 극점은 하향 추세를 외면할 수 없다. 하여 불모로 영성했던 남도가 기회의 땅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지난 연간 오·벽지로서의 낙후와 쇠락이, 중국과 일본 등 특유의 관광물류 접근성이 단군 이래 최대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그랜드비전(Grand vision)이 환골탈태의 계기로 상승(上乘)한다면 재정자립도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걷어내고 손익분기점(Break-even point)을 이월할 가능성이 크다. 진정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위무성 발언이 아닌 내남없이 인정하는 자긍심으로 현실화할 날 이 멀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용의주도한 기획과 전략으로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남도가 가진 강점을 진열하는 데 머무르지 말고 역량을 결집하여 집중화·특성화를 이룩해야 한다. 미국의 슈피리어 호수 밖에 안 되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필요는 없다. 광주-전남(이 대목에서 문화관광 중심지로서 광주-전남을 아우르는 용어도 필요하겠다)에 가면 “한국을 볼 수 있고, 한국을 즐길 수 있으며, ’한국‘을 살 수 있고,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최적의 장치를 계발해야 한다. 투자유치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즐길(놀) 거리인 레저적 요소를 제외하면 이미 최적의 요건이 마련된 셈이다. 차제에 국·공립공원(산·사찰·섬·해안)과 문화재, 특유의 민속과 놀이, 스토리텔링 요소를 갖춘 판소리와 민요 등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혜롭게 활용해야 한다. 남도적 가치와 비전은 상품으로 가공하는 일과 투자유치를 통해 상품을 만드는 일로 대별할 수 있겠다. ‘문화광주, 관광전남’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요소를 어떻게 하면 최상의 조합으로 만들 것인가, 새로 구축하는 사업은 외래 방문객의 소구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찾아내야 한다. 결국 맨파워(Man power)의 구축과 활용에 달려 있다. 환경과 생태를 고려하면서 자손만대에 영속할 문화관광적 가치를 구현하려면, 안팎으로 국제적 수준의 전문가들을 두루 포섭해야 한다. 브레인스토밍을 배제하면 안 되고 공청회와 난상토론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일란성 쌍생아인 광주-전남이, 그리고 시-군-구 행정 단위가 제도적으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 ‘우리 잔치’인 만큼 꼭 우리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부문간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돼야 한다. ‘남도적 정체성’이 ‘한국적 가치’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남도’의 인적 포션을 과감히 줄이고, 큰 안목을 수렴하는 대승적 금도가 요청된다. ‘남도’는 정녕 국가의 바람이자 국민적 요청에 직면해 청정웰빙 문화관광 레저특구로 거듭나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 남도는 땅값이 전국 최저다. 내·외지인들이여, 투자를 서두르라. 지금이 딱 적기다.
칼럼
남도일보
2006.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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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순수(純粹)로 가는 나의 가을 산행 한달의 가뭄 끝에 비가 내리니 푸석푸석하던 무등산 가을 산길의 먼지가 그 사나움을 거두었다. 다시 푸른 하늘 아래 바람재에서 토끼등에 이른 길 양 쪽에 단풍나무도 뒤늦게 윤기를 회복하고 메마른 잎들이 붉은 기운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너덜겅 중턱 이 십리 멀리 오늘 더욱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광주 시내의 그만그만한 집들이 새삼스럽게 오순도순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너를 떠나서 내가 어디로 갈 것이냐. 나는 죽어도 여기 살리라 새삼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 토끼등에서 중머리재로 가자면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옛 동화사 길로 가파르게 한 천보 올라채다가 오른 쪽으로 꺾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봉화대를 지나가는 길이 있다. 봉화대를 지나가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도 잦고 거기에다 발길에 체이는 나무뿌리와 못지않게 군데군데 밉게 드러난 비위 끝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수도 있고 해서 나는 더 힘들지만 동화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 길은 몇 군데 오르내림이 있고 그렇게 장관은 아니지만 흐르다 만 너덜겅도 만난다. 긴 가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너덜겅 바위틈에 서있는 천연의 단풍도 붉게 물들었으련만. 순수하다. 호젓한 산길에서 나는 가끔 새삼스럽게 순수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순수하다는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한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사람도 걸치지 않고 도시도 걸치지 않고 시간도 걸치지 않고 세계도 걸치지 않고 철학도 문학도 걸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걸치지 않고 있다. 나 자신 속에는 같이 있으면서 늘 부딪치고 부딪치면서 언제나 못해본다는 느낌을 남기는 세상 사람이 있고 나와는 달리 키도 크고 무게도 다른 도시가 있고 늘 배신적인 시간이 있고 세계가 있고 그들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안간 힘을 다하고 있는 나 자신의 추한 모습이 있다. 순수하다는 느낌을 따라가면 나는 ‘생각하는 노래’를 만난다. 노래는 작곡 즉 짓는 것과 연주 즉 부르는 것 그리고 감상 즉 듣는 것이 있다지만 나는 또 하나 생각하는 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노래 가운데는 짓는 것과 부르는 것 그리고 듣는 것이 다 같이 공존한다. 생각하는 노래는 짓는 고심이 없고 연주하는 수고로움이 없고 감상하는데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좋다. 자유로운 것이다. 생각하는 노래는 자기가 편곡할 수도 있고 잘 못 불러도 좋고 고쳐 부를 수도 있고 시간과 장소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 생각하는 노래는 창작에 속한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하는 노래 가운데 프랑스 샹송 이브 몽탕의 고엽이 있다. 이브 몽탕의 고엽은 불러도 좋고 그의 노래를 들어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자유롭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엽 속에는 이브 몽탕의 노래도 있지만 제임스 터너의 색소폰 연주도 있고 안드레어 부켈리가 부른 노래도 있고 윌런의 재스 편곡도 있다. 이브 몽탕의 노래는 너무 세련되어 흉내 낼 수가 없어서 좋고 보켈리의 노래는 이태리 식이어서 우수는 약하지만 부담이 없어 좋고 제임스 터너의 색소폰은 색소폰의 특징이 강조되어서 감미롭고 바니 윌런의 재스 편곡은 그 속에 흑인의 세계가 슬픔과 같이 있어 좋다. 나의 생각하는 노래 고엽 속에서 나는 그것들을 모두 같은 순간에 하나로 만든 것이다. 철학자 칸트는 평생 음악을 멀리 하였다고 한다. 음악은 사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가하기에 칸트는 거기에 그의 한계가 있었다. 칸트는 그의 철학 속에 음악까지도 수용했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음악에 부담이 없어야 했다. 그는 음악을 못해본 것으로 짐작된다. 무엄하게도 나는 칸트의 이성보다 나의 무식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무식 속에서 칸트의 이성을 극복한다. 무식은 순수하기 때문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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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파일] 공은 마형렬 회장에게 넘어갔다 김용석 경제부장 마형렬 광주상의 회장이 업무에 복귀하면서 제도개선소위원회를 꾸려가기로 했다. 회원간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광주상의가 일단 봉합 상태지만 화학적 결합을 위해선 회장단 선거제도를 포함한 제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는게 급선무다. 상의는 외부 인사인 법조인 1명을 포함한 4∼5명으로 구성된 제도개선 소위를 구성한 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선거제도 개선과 업무전반에 걸친 투명성 확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소위 활동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마 회장의 남은 임기는 1년 뿐이다. 이 기간동안 정말 좋은 제도를 만들어 축제 속에서 다음 회장을 선출해야 한다. 마 회장의 말처럼 광주상의가 그동안 비정상적인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돼 왔으나 각계의 노력에 힘입어 상공인 모두가 바라는 정상화에 일단은 성공했다. 이번 사태를 교훈삼아 상공업계의 대화합과 지역경제 발전에 앞장서야 한다. 지금까지 상의 선거는 인맥이나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한 쏠림현상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 상의 사무국에서 관리하고 있는 회장단 선거를 선거관리위원회에 위임을 통한 공정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선관위 위탁 관리도 고려해볼만하다는 얘기다. 인맥선거, 돈선거가 아닌 정책선거를 위해 사회시민단체에서 내 놓은 대안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상의 선거가 상공의원들의 합의에 의해 회장단을 뽑는 ‘교황선출방식’인 탓에 정책 선거보다는 지지세력 확보를 위한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면서 그 후유증이 너무나 커 나온 대안인 것이다. 그리고 상의 회장선거 논란의 핵심은 공적논의와 공적책임의 결여 때문에 나왔는데도 집행부에서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마 회장이 뼈 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상의에 등을 돌린 중견 기업들도 적지 않다. 이들을 끌어 안기 위해선 공익종합경제단체로서의 위상변화와 비전을 보여주는 모습이 절대 필요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국내외 기업의 지역 유치에 상의가 앞장서야 하는데도 내부 분열로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지역 상공인을 대변하는 대표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번 파행을 몰고 온 상의 회장단 선거 규정의 조속한 개정과 기형적인 상의 회원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 성공인들은 “광주상의의 파행은 비민주적인 선거규정과 기형적 구조에 기인하므로 제도 개선이 무엇 보다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어 하는 얘기다. 무엇보다 상의 회원들이 건설업체 위주로 이뤄진 기형적 구조를 빠른 시일내에 해소해야 한다. 다시 말해 건설업 등 특정 직종에 편중된 상의 의원 분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또 경영에 대한 투명성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회원 상호간 신뢰회복은 물론 자신들만의 이익집단이라는 시민의 인식 개선 문제도 마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제도개선소위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공정한 인사들로 꾸려지기를 바란다. 특히 회장 선거제도 만큼은 백년대계의 안목이 절실하다. 내년 9월까지 회장직을 한시적으로 수행하는 마 회장에게 이제 공이 넘어갔다. 행여 마 회장이 후계자를 심기 위한 꼼수를 부릴 경우 그 후폭풍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회비를 많이 내고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기아차 광주공장, 광주삼성전자 등 대기업의 협조와 적극적인 참여도 있어야 한다. 모두가 참여해 활발한 토론과 논의를 거쳐 알토란 같은 제도를 생산하기 바란다. 그래서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경제단체로 거듭나야 할게 아니던가. 또 최근 광주지방국세청에서 열린 4개 지방국세청 국정감사에 앞서 지역경제 현안 업무보고를 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가 대신 했는지도 되새겨 봐야 한다. 16대 국회 재경위의 한은 지역본부 국정감사 당시 어려운 지역경제 현황보고를 광주상의가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하는 말이다./y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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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2006.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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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세평] 인문학 위기, 이래도 되는가 김영관 교수(조선대 영문과·희곡작가) 사물엔 외면과 외면 이면에 숨어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내면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과학발달과 더불어 외면에 드러나 보이는 현상을 중시하다보니 내면의 세계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과학 만능 사회는 오감으로 감지가 가능한 외면 세계 탐구에만 우리가 열을 올린다. 논리적이고 실증 가능한 것만을 신봉한 나머지 우리 인간들은 오감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닌 것은 불신하려 든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태도는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모든 사물을 2+2=4라는 공식으로 보려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2+2=5로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분야를 주로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인 것이다. 실증주의 중심의 과학을 만능으로 생각한 나머지 형이상학적인, 다시 말해,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학문, 인문학 경시 풍조의 도래는 매우 우려스러운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추세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삶이어서 나무랄 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감지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사람으로서 살아가야할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행하도록 가르치는, 윤리학, 철학, 그리고 이것들을 소재로 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문학을 경시하는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세상을 만든다. 물질문명의 발달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작 사람이 살아야할 바른 길을 인도하는 정신문화엔 무관심하게 되어 균형감각을 상실한 현대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사물에 존재하는 양면성 탐구엔 소홀케 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케 한 것이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삶을 살아가는데 편리는 하겠지만, 그 보다는 그 아파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생관, 도덕관, 가치관 또한 이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언젠가부터 이런 것들은 무시한 채 그가 얼마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가가 인격을 재는 중요한 척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비싼 승용차를 탄 사람일수록 고귀한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포장되어 보이는 사회야말로 기형적인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질적인 풍족함만을 누리기 위한 삶을 우선시 하다보니 부를 축적키 위해 자신의 취향, 적성과는 상관없이 수입이 좋은 직장만을 찾게 된다. 그 결과 이 나라의 훌륭한 인재들이 돈 생기는 곳으로만 몰려들고 있다. 직업에 무슨 귀천이 존재 하겠는가 마는, 진정 인재를 필요로 하는 직종에는 사람이 모여 들지 않는다. 치대, 의대, 그리고 판·검사 직종으로만 인재들이 몰려들고 딸 가진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이는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재가 여러 분야에 고루 분포된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만시지탄의 감이 없진 않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세계 추세가 그러니 우리나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추세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이를 고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 가야할 사람들, 다시 말해 동시대인들에 대해 갖는 인간애, 부모와 은사에 대한 존경심, 부부애, 이 모든 것들이 가시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않지만, 인문학을 통해 얻게 되는 귀한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소중히 하면 할수록 함께 살아가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귀한 학문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살리는 일에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칼럼
남도일보
2006.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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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 예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가(官街)의 10월은 예산 시즌이다. 중앙정부든 지방자치단체든 일손이 바빠진다. 이때 그들이 짜는 예산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다. 당연히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편성돼야 하겠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얘기다. 어느 핸가 클린턴이 ‘사회보장제도를 위한 세금감면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사업들엔 연방정부의 돈을 쓰도록 결재했다고 한다. ▲ 집파리의 성생활 연구, 23만달러 ▲ 죄수들이 왜 탈출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연구, 2만7000달러 ▲ 올바른 발톱깎는 법 보급, 4백만달러 ▲ 왜 미국인이 바퀴벌레를 싫어하는가에 대한 연구, 십만달러. 이 어처구니없는 예산행위에 대해 미국의 스타 방송저널리스트인 빌 오릴리는 이렇게 꼬집었다. 이 연구 과제들의 해답을 ‘공짜로’ 가르쳐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 집파리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짝짓기를 한다 ▲ 죄수들은 감옥을 싫어한다 ▲ 발톱은 발톱깎이로 매주 깎아야 한다 ▲ 바퀴벌레는 맛이 없다. 오릴리는 이것으로 무려 4백35만7000달러를 절약할 수있지 않느냐며 클린턴 정부의 넌센스를 한탄했다. 피같은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게 어찌 미국 뿐이랴. 연봉으로 1억 가까이 받는 우리 나라 공공기관 감사들은 월평균 300만원 가량의 판공비를 골프비용 등 개인용도로 사용했고 정치인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 모 감사는 문화예술자료를 구입한다며 ‘식객’, ‘미스터 초밥왕’ 등 만화책을 구입하는데까지 판공비를 썼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정부 역시 예산을 낭비하기는 마찬가지다. 참여정부 들어 감사원이 타당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며 시정 권고한 국책사업의 총 사업비만 해도 39조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정부가 부당 수의계약, 공무원 횡령, 부실시공 같은 명백한 불법행위로 끼친 손실만 따져도 2조원을 넘는다. 그러다 보니 2002년 말 133조6천억원이던 나랏빚은 이 정부 4년 동안 283조8천억원으로 2배가 불어났다. 지방정부라고 세금을 허투루 쓰는 일에 뒤질 리가 없다. ‘비효율적 축제를 정리하라’고 사방에서 다그치지만 한 해 열리는 지자체의 축제행사는 전국적으로 1천건이 넘는다. 지난해에는 축제비용으로 5천914억원이 쓰였다. 살림규모는 아랑곳않고 허리휘도록 잔치만 벌이는 셈이다. 그래서 일반 주민들도 예산내역을 알아야만 한다. 알아야 감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산’하면 머리부터 무거워진다.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그러나 예산, 알고 보면 쉽다. 예산이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1년 동안 수행하여야 할 목표와 사업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수입과 지출에 관해 금전으로 표시된 숫자적 예정표다. 이 예산과 관련해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재원 부족’이다. 특히 지자체들은 수입(세입)이 한정된 반면 지출(세출)이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다. 이처럼 살림이 어려울수록 재정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돼야 한다. 그리고 그 열쇠는 이제 주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게 ‘예산 공개의 원칙’이다. 시민참여 예산제도와 지방재정 공시제도가 좋은 예다. 그런 차원에서 광주시의 움직임은 평가받을만 하다. 시는 시민참여 예산제를 도입하기 위해 지난 8월부터 한달간 시 인터넷 홈페이지에 예산참여방을 개설해 시민의견 수렴과 함께 투자수요에 대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지난 9월엔 2007년 예산편성 시민설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지방예산에 대한 시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민예산학교도 운영했다. 그러나 이렇게 애를 써도 시민들이 외면하면 효과는 없다. 제 돈으로 낸 세금이 적재적소에 쓰이는지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방예산에 대한 시민의 올바른 이해와 관심만이 지방자치제의 핵심인 재정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칼럼
최혁
2006.10.23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