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퇴계가 그날 밤 며느리 류씨 방에서 본 것은, 바로 짚으로 만든 괴(傀), 즉 허수(虛守)아비였던 것이었다. 젊어 남편 잃은 류씨는 홀로 독수공방(獨守空房)하다가 사무치는 남편 그리움에 못 이겨 짚으로 남편의 허상을 만들어 앞에 놓고 앉아 혼자 일인이역(一人二役) 독백(獨白)을 하며 쓸쓸히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그 독백을 우연히 듣게 된 퇴계는 깜짝 놀라서 며느리의 방을 몰래 엿보게 되었고, 며느리 앞에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어느 선비의 흰옷 자락을 확인하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아무리 급하더라도 두 눈으로 반드시 사실확인(事實確認)을 한 연후에 조치해야 할 것이었다. 지레짐작 정황(情況)만을 보고 추상적으로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맞추어 상상해 그리고 그것이 마치 진실이고 옳은 것인 양 확신하여 믿고, 마구잡이로 성질 급하게 일을 치른다면 자칫 잘못 크게 낭패(狼狽)를 볼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천하의 대학자 퇴계는 역시 가정사에 대하여서도 예외 없이 세심(細心)하고, 신중(愼重)하고 정확(正確)했다. 비록 며느리의 방안을 훔쳐보는 좀스러운 짓을 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상황에
순간 퇴계(退溪)는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이 깊은 밤에 혹여 며느리가 정말로 외간 사내라도 끌어 들여와 함께 있다면 이를 어떡할 것인가? 내로라하는 나라 안의 박학(博學)한 유학자(儒學者)요, 고관(高官)을 두루 지낸 청정사대부(淸淨士大夫) 집안에서 큰일 날 일이 아닌가! 퇴계는 숨을 죽이고 며느리 방 앞에 발을 멈추고 서서 무슨 소리가 새어 나오는지 잔뜩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제 술 한잔 받으세요!”그것은 분명 며느리 류씨의 목소리였다.“어흠! 좋소이다. 어서 따르시오!”그런데 저것은 분명 사내의 목소리였다.세상에 이럴 수가!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정대감이 보낸 서신의 내용대로 딸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제 어머니에게 보낸 여인의 아버지는 다시 정대감이 보낸 서신을 꺼내 들고 읽으며 재삼 음미(吟味)해 보는 것이었다.서경(書經) 대우모편(大禹謨篇)에 이르기를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 주면서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미약하니, 정성을 다해 한마음으로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항상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感情)에 들끓어 살아가는 게 세상살이 아니던가.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그것은 다름 아닌 정대감이 보낸 서신의 내용 때문이었다. 남편을 여의고 수절과부가 되어 사는 딸자식이 시아버지가 급하게 보냈다고 들고 온 서신을 펼쳐 들고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는 아버지는 그 내용을 읽는 순간 깊이 감응(感應)하는 바가 매우 컸던 것이었다.‘사돈, 내 비록 아들을 먼저 보낸 고통이 크다고는 하나 나이 어린 며느리가 홀로 되어 독수공방 수절과부로 평생을 늙어 죽을 것을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소이다. 인간의 삶에 합당(合當)하지 않는 비인간의 법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내 여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뜻밖의 말을 들은 여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면 시아버지 정대감은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무무……무슨 연유로 그러신 거지요?”여인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에게 말을 더듬거리며 조그맣게 말했다.“다름이 아니라 너를 며느리로 보아서는 아니 될 까닭이 있다는구나!”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댁이나 친정의 명예에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터! 사실 여인은 이미 김선비와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여인은 전전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생사명운(生死命運)을 가름할 시급한 찰나에 자신의 전부를 그 운명의 불길에 주저함 없이 내던질 줄 모르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명점술가 이만갑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런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고는 닥쳐올 둘의 운명에 모든 것을 내맡겨버린 것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어갈 처량한 운명이라면, 과감하게 한목숨 던져 걸고 운명의 강에 몸을 던져 임전무퇴(臨戰無退) 도전할 줄 알아야 할 것 아니던가! 다행히도 그날 밤 김선비와 여인은 단명살운(短命殺運)과 수절과부운(守節寡婦運)을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어흠! 이술사,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내 말 하겠네! 비록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고 국법이 엄연하다지만, 그것에 얽매어서 젊은 며느리를 쓸쓸히 살다가 죽게 할 수 없으니 내 며느리와 잘 맞는 운명의 사내가 있다면 중매(仲媒)를 서주기 바라네”마침내 정대감이 이만갑을 바라보며 속을 탁 까놓고 숨김없이 말했다.“아이구! 나리! 나리의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만,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모두 다 인연(因緣)에 따르는 것이라 과연 그러한 인연을 맺어주는 일이 소인에게 있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그렇지요. 며느님께서는 이미 남편을 여의어 액땜도 하였으니, 궁합(宮合)이 잘 맞는 좋은 분을 다시 만난다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이만갑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으음! 이술사 그렇다면 다행 아닌가! 허허! 세상사 흥진비래(興盡悲來) 고진감래(苦盡甘來)라!”정대감이 나직이 혼잣말처럼 말했다.즐거움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흥진비래라는 말은 당나라 때 저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왕발(王勃)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 아니던가!장강 유역에 서 있는 당고조 이연의 아들 원영 즉, 등왕
“이술사! 다름이 아니라 우리 며느리 말인데, 우리 며느리는 시쳇말로 사주팔자(四柱八字)가 사나워서 평생을 독수공방(獨守空房)하는 수절과부(守節寡婦)로 살다 죽어야 할 운명인가?”정대감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이구! 나리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사대부(士大夫) 양반(兩班)가의 며느리로서 혼인한 후 남편을 사별(死別)하여 잃었다면 일부종사(一夫從事)하여 절개(節槪)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세상이기에 마땅히 도리를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이만갑이 말했다.“으음! 여기 이술사와 우리 둘만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난 그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아이구! 나리! 괜찮고 말고요. 가끔 소인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날이 저물어 하룻밤 유(留)하고 가야 할 분이 더러 있기에 누추하기는 하지만 사랑방을 거처(居處)하고 있습니다. 좋은 곳은 아니라도 주무시고 가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이만갑이 흔쾌히 말했다.바로 날이 저물어 정대감은 이만갑의 사랑방에 들었다. 잠시 후 호박 된장국에 각종 나물에 김치가 올라온 정갈한 저녁상이 차려져 왔다.“차린 것이 별로인데 입맛에 맞을 줄 모르겠습니다”이만갑이 말했다.“어흠! 이만하면 훌륭한 밥상이외다!”정대감이 말
“이술사(李術士)께서는 사람의 생사운명(生死運命)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것인가?”정대감이 이만갑을 바라보며 말했다.“으음! 어려운 질문이시온데 옛사람들이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방법을 연구해 놓은 서책들을 보고 그들의 방법으로 점을 쳐서 예견했을 때 도무지 하나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방법으로 점을 쳤을 때 맞아떨어진다면 분명 어떤 법칙(法則)과 나아가는 궤적(軌跡)이 정해져 있기에 맞추어낸 것이겠지요. 신(神)내림 받은 무당(巫堂)은 신이 들려 그 신이 일러주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한 달여 후 정대감은 김제에 있는 이만갑을 만나러 아침 일찍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가 죽어간다고 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애초 정해져 있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야 구태여 그 운명이란 것을 알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알든 모르든 간에 어차피 운명대로 굴러떨어질 게 뻔한 것인데 말이다.그래도 사람들은 미래에 닥칠 일이 궁금하여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고는 하는 것인데 왜 그러는 것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기력을 회복한 정대감은 어린 며느리에게 새 삶을 살게 할 것을 고민했다. 이미 죽어버린 아들을 바라보고 평생을 독수공방(獨守空房) 수절과부(守節寡婦)로 살다가 홀로 늙어 죽는다는 것은, 차마 아니 될 일이었던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도 피하고, 무엇보다도 어린 며느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돌리게 할 특별한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정대감은 ‘귀신처럼 잘 맞춘다.’ 하는 점술가 이만갑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허흠! 점술가 이만갑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대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낳아서 애지중지(愛之重之) 길러온 자식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정대감이 다시 밥을 먹고 기력을 회복까지는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부모를 잃은 고통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한다면, 자식 잃은 슬픔은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하지 않던가!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과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 물론 모두 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모 잃은 고통보다도 자식 잃은 슬픔이 더하다고들 하지 않던가!동진의 장군 환온이 촉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이었다. 숲이 우거진 강어귀에서 아침을 먹기
“신령(神靈)님! 어찌하여 소녀, 이리 팔자가 사납고 박복(薄福)하여 신혼(新婚)의 즐거움도 없이 젊은 남편을 여의고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었단 말입니까? 신령님! 저는 어찌 살아가란 말입니까? 차라리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어흐흐흐흐흑!……”소복을 한 젊은 며느리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박고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었다.그 모습을 본 정대감은 혹여 며느리가 볼까 가던 길을 얼른 되돌아 나오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혼잣소리를 하며 혀를 끌끌 찼다.“허허! 나는 내 자식 잃은 내 고통만 생각하고 있었지, 딸 같은 저 어린 며느리의 고통과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김선비는 기쁜 마음으로 그 길로 사랑하는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친정집, 즉 자신의 처가(妻家)를 향해 함께 길을 재촉해 가는 것이었다.며칠 후 처가에 당도한 김선비는 처가 사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소와 돼지를 잡고 각종 생선을 찌고 굽고, 육전이며 튀김을 지지고 볶고, 온갖 과일과 나물 등 산해진미(山海珍味)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꽹과리, 징, 북, 장구, 피리에 날라리 등 각종 악기가 나와서 요란하게 울리고 재미나는 굿판에 잔치가 벌어졌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선비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여보시오! 선비님! 어찌하여 장곡의 소복을 한 수절하는 여인과 그날 밤 백년가약(百年佳約) 하였으면서도 치졸하게 이를 모른다고 한단 말이오! 더구나 그 여인이 주신 백마를 타고 한양 길을 가신 것이 아닌가요?”그때 일행 중 갓을 쓴 젊은 선비가 앞으로 턱 나서면서 말했다.어찌하여 저 젊은 선비가 그날 밤 여인과 단둘이만 알고 있어야 할 비밀(秘密)스러운 일을 모조리 다 알고 있단 말인가? 그 여인은 지금 수절과부(守節寡婦)의 몸으로 소복을 입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혹여 일이 잘못되어 고약한 시
뭐라?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사내에게 부인이라니? 참으로 당치 않은 말이었다.“어허! 아직 혼전(婚前)인데 부인이라니? 그 무슨 망발(妄發)인가?”순간 김선비가 노인을 매섭게 노려보고 버럭 화를 내며 사납게 호통(號筒)을 쳤다.“아이구! 선비 나리! 일전에 장곡(長谷)에서 만난 여인을 그새 잊으셨습니까?”노인이 김선비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허! 허흠! 장곡이라?…… 그건 내 알 바 아니오!”김선비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노인을 쏘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장곡의 여인이라면 분명 김선비가 과거시험
이윽고 김선비는 과거시험일 직전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만약 여인이 백마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늦을 수도 있었다. 비록 백마 도둑으로 몰려 소동이 나고 곤욕을 치르기는 했으나 정대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과거 시험장에 잘 도착하였으니 이것이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순전히 저 점술가 이만갑의 점괘 때문이 아닌가!김선비는 무사히 다음날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과거시험을 치렀다.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하지 못함이 모두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면 평생 공부를 해 온 것을, 마음껏 구술(具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