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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5><요동의 천연수호자 요택①>
  • 남도일보
  • 승인 2013.02.13 18:04

수·당나라 침략으로부터 고구려 서북부 지켜낸 천험(天險)
‘아득히 넓은 늪’이란 뜻…수 많은 하천망으로 형성된 요새    
계절 따라 크기 변화…당 태종 침공 당시 동서 200리 달해 
“땅이 온통 진흙탕이어서 말과 수레 다닐 수 없었다” 기록도
 

   
반금소택지의 여름철 모습.
요녕성 한복판을 세로 지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요하(遼河)강은 옛날 고구려가 차지하던 요동(遼東)을 수호하는 천연적인 해자다. 당시 이 해자 옆에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천험(天險)이 하나 있었다. 왕래를 못할 정도로 험한 이 천험은 적군이 요서(遼西)로 해서 요동으로 쳐들어 갈 때, 마치 저승길처럼 앞을 가로막아 그렇게도 꺼리고 두려워했건만 건너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지역이었다. 바로 역사상 그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요택은 옛날 중원(中原)세력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수많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고장이었으므로 고구려 서부변경 바깥에서부터 오는 침공을 자연적으로 저지해주고 고구려정권의 생존을 연장시켜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 요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요택은 요하와 갈라놓을 수 없으므로 먼저 요하유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의 7대강으로 꼽히는 요하강은 상류가 동요하와 서요하로 갈라져 있다. 동요하는 길림성 요원(遼源)시 합달령(哈達嶺)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점차 서남쪽으로 굽이돌아 요녕성 철령(鐵嶺) 경내 창도현(昌圖縣) 복덕점(福德店)에서 서요화와 합류한다. 서요하는 내몽골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백차산(白叉山)에서 발원한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와 하북성 평천현(平泉縣) 칠노도산맥(七老圖山脈)의 광두산(光頭山)에서 발원한 노합하(老哈河)가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의 소가포(蘇家鋪)에서 합류해 한 줄기 강물로 형성되어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요녕성 창도현 복덕점에서 동요하와 만난다.

사람들은 이 동요하와 서요하가 합류해 흐르는 물줄기를 요하강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복덕점에서부터 요하로 불리는 이 강은 남쪽으로 철령지역을 지나 심양 경내의 석불사(石佛寺) 저수지와 신민(新民), 요중(遼中)을 거쳐 안산(鞍山)지역의 대안(臺安), 해성(海城)과 반금(盤錦) 지역의 반산(盤山)과 접경지대에 들어선 다음 삼차하(三叉河)란 곳에서 지류인 혼하강과 태자하가 합류된 물줄기와 외요하(外遼河)로 연접되었다. 이리하여 요하강은 여기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진 셈이다.

한 갈래는 반금으로부터 발해(渤海)로 흘러들고, 다른 한 갈래는 영구(營口)에서 발해로 유입한다. 이 두 강줄기 사이에 원래 외요하가 이어져 있어 강물이 서로 통했다. 그런데 1958년, 반산현 육간방(六間房)지역의 외요하를 막아버려(이로 인하여 외요하가 폐기됨) 두 강줄기가 제각기 바다로 흘러들게 되었다. 요하강 원래 물줄기는 반금에서 바다로 흘러드는데 쌍대자하(雙臺子河)라 부르고, 혼하와 태자하가 합류된 물줄기는 영구에서 바다로 흘러드는데 대요하(大遼河)라 부른다. 요하강의 상류는 동요하와 서요하의 발원지에서부터 두 강물이 합쳐지는 복덕점까지고, 복덕점에서 심양 북쪽 석불사저수지까지는 요하강 중류이며, 석불사저수지에서 쌍태자하 입해구까지는 요하강 하류인데 이 구간을 하요하(下遼河)라 일컫는다.
세상만물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요하강과 이와 관계되는 요택도 마찬가지다. 중국 발해대학(渤海大學) 부교수 초충순(肖忠純)은 그의 저서 <요령역사지리(遼寧歷史地理)>에서 각 역사시기 요령지역의 지형, 기후, 산림, 하천, 해안선과 옛날 ‘요택’의 변천을 서술해 놓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수천년 동안 요하강과 그 지류 혼하, 태자하 등 요하수계(遼河水系)는 다른 강과 마찬가지로 그 유역과 상태가 여러 번 변하였으며, 요하가 흘러드는 발해만 꼭대기 해안선도 끊임없이 남진(南進)하여 오늘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지난 역사시기 기후, 홍수의 범람, 강줄기 위치의 움직임 등으로 말미암아 요하연안에 호수와 소택지가 많이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면적이 아주 넓고 큰 것을 보고 ‘요택’이라 일컬었다.

초충순은 ‘요택’이란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역사자료는 적지 않지만 상세하게 그 지리범위를 밝혀놓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한다. 그러므로 고대 요하유역의 이런 습지에 대한 전면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아직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요택과 관련된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 발견의 성과, 고대 현지 현과 진(鎭)의 설치, 교통노선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요택의 지리범위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요나라 초기까지 요하의 상류 서요하충적평원에도 호수, 소택지, 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초지로 이루어진 요택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기후변화와 그 지역 토지사막화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말하는 요택은 주로 하요하(下遼河, 심양 북쪽 석불사저수지 남쪽의 요하구간) 평원에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부동한 역사시기 그 지리범위도 같지 않다.

먼 옛날부터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요택은 현재 북진(北鎭, 금주 소속 현급 시)~요중(遼中) 사이에 분포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로 현재 북진, 흑산(黑山), 신민, 요중, 대안(안산시 소속 현), 반산(반금시 소속 현)이 둘러싼 구역이다. 현대 지리 상황을 본다면 이 구역은 요하강 서쪽의 움푹 파인 평원으로서 주변지역이 모두 높게 솟아있는데 서쪽은 요서 구릉이고 북쪽은 요북 낮은 구릉지며, 동쪽과 남쪽 지역은 또 상대적으로 좀 높다. 이런 지세는 하천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하고 또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수많은 호수와 소택지를 형성했다.

삼국시기부터 수나라, 당나라 때까지 요하강 서쪽에 있는 요택의 범위가 더 커졌다. 이 시기 동서방향으로 요택은 기본상 변하지 않았지만 남북방향으로는 더 늘어났다. 삼국시기 요하강 동쪽지역은 공손씨(公孫氏)가 할거(割據)하고 있었고, 요하강 서쪽지역은 선비(鮮卑)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지역은 무(無) 관리지역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때도 이러했다. 때문에 요택 동남부지역에 한나라가 설치했던 험독현(險瀆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대안현 동남쪽 손성자<孫城子>마을)와 방현(房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반금시 대와현 소염탄<盤錦市大窪縣小鹽灘> 부근)은 삼국시기 폐기된 후 청나라 말기에 와서 거기에 대안현을 설립할 때까지 요택지역에는 1천600년이 넘도록 아무런 주(州)와 현(縣)이 없었다.

요택 북부에 있었던 망평현(望平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신민시 전당포진 대고성자촌<前當鋪鎭大古城子村>)도 후연(后燕)시기 폐기되어 수나라 때 와서야 신민 고대자(高臺子)에다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요택지역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도 줄곧 황량하고 쓸쓸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동안 이곳의 하천들이 여러 번 넘쳐나 호수와 늪이 많은 소택지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요택은 남쪽으로는 현재 대안현 전부와 반금 동북부지역까지 퍼져나갔고, 북쪽으로는 현재 신민 남부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때 요택의 동서너비가 200리가량 된다.

명나라와 청나라시기 요하강 동쪽까지 확대된 요택이 또 늘어났다. 이에 앞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때, 전 시대(前時代)에 있었던 요택은 점차적으로 요하강 동쪽으로 번져나갔다.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 이르러 요하강 동쪽의 이 소택지가 심양 서부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청나라 대학사(大學士) 고사기 (高士奇)는 북경에서 심양으로 강희황제를 따라 순방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이렇게 써 놓았다. “…심양에서 요하까지 100여리 사이인데 지세가 낮아 땅이 온통 진흙탕으로 되어 말과 수레가 다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청태조는 심양을 도읍지로 정한 다음 팔기(八旗, 군사성과 행정성을 띤 청나라의 조직)의 일꾼들을 시켜 너비가 3장되는 첩도(疊道, 흙을 퍼 올려 겹쳐 쌓은 길)를 120리나 수축해 심양에서 거류하(巨流河, 심양 서북쪽의 요하강구역의 별칭)까지 평지처럼 오고 갈 수 있게 해놓았다고 한다. 소택지가 심양 서부지역까지 늘어난 동시에 요양 서쪽에서부터 그 서남쪽으로 해성의 우장(牛莊)까지도 소택지가 형성되었다.

위 두 지역이 소택지로 변하게 된 것은 주로 요하, 태자하·혼하가 범람해 강줄기가 변한 까닭이다. 이 세 갈래 강이 여러 번 넘쳐나고 강줄기가 서쪽으로 몇 번 옮겨져 요하 강변에서 심양서부지역까지 소택지가 넓어지게 되었고, 이 세 갈래 강의 합류점이 그냥 남하(南下)해 요양서쪽에서 그 서남쪽 우장까지의 지역이 소택지가 된 것이다.

요택, 이 두 한자는 원래 아득히 넓은 늪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말하는 요택은 면적이 대단하게 큰 그런 호수나 늪이 아니라 요하평원에 물이 많이 있는 조건아래 형성된 여러 가지 자연지모(自然地貌)의 종합체(綜合體)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요하평원은 예부터 하천이 밀집해 있다. 그 남북을 꿰뚫고 있는 요하강의 서쪽에는 요양하(繞陽河), 유하(柳河), 서사하(西沙河), 양장하(羊腸河) 등 여러 갈래 지류가 있고, 동쪽에는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 사하(沙河) 등 여러 갈래 지류가 있다. 이밖에 또 이런 하천들과 이어져 있는 기타 작은 하천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하천망으로 갈라놓은 소택평원지모를 이루고 있다.

   
옛날 요택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현재 반금의 소택지.
이 지역에는 갈대와 수초들이 무수히 자라는 진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종횡으로 뻗어나간 하천과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 지역은 하천, 호수, 늪과 수렁 등으로 서로 엇갈려 있는 소택지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요택은 오랜 기간 지속됐을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어마어마하다. 요택의 규모가 제일 컸던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는 동쪽으로 요양과 심양의 서부지역, 서쪽으로는 북진과 흑산의 동부지역, 북쪽으로는 신민 남부지역, 남쪽으로는 반산과 해성의 우장까지인데, 남북길이가 약 300리 되고 동서너비는 200리가량 된다.

옛날에 요택의 소택지범위가 계절 따라 변화했다. 요택의 수원(水源)은 일반적으로 지면에 흐르는 물, 지하수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섞여 보급되는데 그 물이 줄어들어 마르면 습지생태시스템이 육지생태시스템으로 바꾸어지고, 또 물이 불어날 때는 습지생태시스템으로 되돌아간다. 수문(水文,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물의 변화와 운동 상황)이 요택의 시스템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요하평원의 소택지는 강우량 변화에 따르는 계절의 변화성이 뚜렷하다. 이는 비가 많이 오는 여름과 가을철에 요택의 면적이 불어나고, 비가 적게 내리는 계절에는 요택의 면적이 줄어드는 데서 나타난다.

역사기록을 본다면 기원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왔을 때는 마침 5월이어서 ‘진펄 200여리’를 지나서야 요택을 넘게 되었고, 철군하여 되돌아갈 때는 9월 하순인데 요택의 ‘진펄이 80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겨울에는 요택이 얼어붙어 진펄이 사라진다. 때문에 요택 지리범위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데 줄곧 어려움이 있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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