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교]은전(恩典)

‘은전(恩典)’이란 낱말이 있다. 명사로 쓰이는 이 단어는 ‘은혜를 베푸는 일’로 풀이하고 있다. 요즘 정치권에선 ‘은전(恩典)’즉, 사면(赦免)을 놓고 시끌시끌하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광범위한 대상에 걸쳐 사면이 단행될 것이란 얘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면은 전근대시대 군주국가의 산물로서 군주의 은사(恩赦)로 부터 유래한다. 일본의 경우 여전히 ‘은사권’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1948년 8월 30일 일본법의 영향을 받아 사면법이 제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세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민주국가들은 국가적 경사 때나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 국가원수가 관련법에 따라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사면(amnesty)의 어원은 원래 ‘망각(忘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mnestia’에서 비롯됐다. 망각은 범법자가 죄값을 치르고 피해자의 원한이 풀어진 다음에야 나올 수 있는 의식이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행해졌던 사면의 실상을 보면, 속죄와 신원과는 거리가 멀다. 외환위기를 유발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던 각종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과 전직 은행장들, 역사의 물줄기를 왜곡시켰던 군사쿠데타의 주역들,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자들, 부정선거 사범 등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인사들에게까지도 은전(恩典)이 주어졌다.
물론 사면권은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합리적인 기준도 없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자의적인 재량권은 아니다. 내재적인 한계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누구에겐가 은전을 베푼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으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보검(寶劍)을 자주 빼어들면 가치는 하락되는 법이다.

김선기 논설위원 kims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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