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대순의 세상보기] 나의 복날

옛날 같으면 집에 앉아 인사를 받아야 할 나인데 오히려 인사를 하고 다니는 일이 많다. 그날도 그 인사를 위하여 인천 공항에 가야했다. 아우 가족이 몇 해가 될지 기약이 없이 출국한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공항에서 20년 전에 작고한 집안 어른 한 분을 만났다. 그때 이미 간암 증세가 깊어 회생의 전망이 없는 가운데 당신의 외손녀 하나의 유학길에 김포로 전송을 나온 것이다. 그 전송은 피차 최후의 만남이었다. 오늘 아마 나도 출국하는 아우 가족들에게는 마지막 만남이 될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우가 아홉살때 가친이 작고하였기 때문에 아우를 내가 키우고 가르쳤다. 전후 어려운 시대라 그가 성장하고 수학하는데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대로 탈 없이 자라고 공부하더니 해병 장교가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최근에 정년하였다. 객지에서 돕는 사람 없이 혼자 힘으로 살면서 형인 나하고는 달리 그는 착실하고 실사구시를 잘 익힌 사람이다. 그가 가족과 같이 기약 없이 미국으로 떠나는 길이니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마음에 생각이 많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신문을 봤더니 그날이 중복이었다. 주변에 꼭 복날을 챙기는 친구도 있지만 나는 내가 앞장서서 복날을 챙기는 사람은 아니다. 사실 나는 복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때 복날의 그 야만적인 기억을 상기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복날 개 패듯’ 한다는 것이 있다. 주로 아내를 때릴 때 쓰는 비유이다. ‘개와 여자는 패야 말을 듣는다’ 라는 말도 있다. 복날이면 얄궂게 꼭 그런 생각이 난다. 나의 무의식 속에 살아있는 악연인 것이다.
복날 이런 기억도 따라 다닌다. 해방되고 다음 해이던가 우리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양림동 수피아 여학교 앞길이었는데 왜 거기를 걸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친구 이강재와 동행이었다. 갑자기 바로 뒤에서 숨넘어가는 절박한 개 울음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다. 어느 무지막지하게 생긴 남정이 안간 힘으로 버티는 개를 끌고 가는 길이었다. 개의 입은 피범벅이었다. 올가미를 물어 뜯었기 때문이다. 친구 강재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하나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기도가 얼마나 절실하던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어렸을 때 시냇가나 도랑에서 우리는 잘 검게 그을린 개를 씻는 어른들을 구경하군 했다. 개는 이빨을 내밀고 있었다. 죽을 때의 마지막 모습이다. 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주인이 목에 올가미를 걸어야 한다. 개는 주인만을 믿기 때문에 올가미를 걸어도 주인이 걸어야 개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게 올가미를 걸면 올가미 한 쪽을 주인은 개장이에게 넘긴다. 그러면 끝이다. 개장이는 그것을 지개 발에 걸어서 잡아 다니거나 나뭇 가지에 걸어 잡아 다니거나 때로 사립문에 걸고 잡아 다니거나 하여 질식시킨다. 질식하면서 개는 꼭 이를 내밀고 죽는다. 개장이가 집 다발에 쌓아 지게에 지고 가면 우리는 늘 그 뒤를 따라갔다.
늘 보고 자란 풍경이다. 자식처럼 멍멍이니 검둥이니 이름까지 별도로 지어 부르면서 같이 사는 멍멍이가 가족을 믿고 꼬리를 치면서 내미는 목에 올가미를 걸어서 죽음의 사자에게 그 끈을 넘긴 죄의 인연에서 자유로운 한국인은 많지 않다. 본인은 아니라도 그 아버지나 그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개고기가 대부분 중국에서 오기 때문에 다행히 이 시대 죄는 중국 사람들이 대신 지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죄책감 없이 보신만 하면 되는 복을 탄 것으로 느끼고 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고기는 먹어야 하고 여름에 그것도 복날 같은 날 특히 한국 남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개와의 악연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아우여 미국에 가면 자네들이나 그 악연을 끊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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