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풍경속에는 온통‘젊은 피’들로 낭자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는 배반과 혐오의 대상이었고 낡아빠진 기성가치란 허섭쓰레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얘들은 가라’고 하던때는 이미 옛날얘기. 이들은 상품시장에서 ‘최고의 왕고객’이었고 끊임없이 스타를 갈아치우기도 했다.
집단따돌림인 ‘왕따’가 사회이슈로 떠오르는가 하면 영화, 출판계에서는 10대들의 고민과 방황을 담은 내용들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데카당트적이고 컬트스런 이미지로 뒤범벅된 시대.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10대들은 ‘그들만의 우상’에 집착했다.
96년초 서태지가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해버린 뒤 그로부터 유전자를 흡수한 댄스그룹은 만화방창이었지만 딱히 아이콘이라 부를만한 수퍼스타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쿵따리 샤바라’의 클론이나 복고풍 댄스리듬을 들고 나온 영턱스 클럽정도가 10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한동안의 텅 빈 공허. 96년말 TV를 통해 공식데뷔한 H.O.T 역시 그 공백을 메우기엔 다소 미약해 보였다. 아직 털이 보송보송한 앳띤 ‘학생’들인 이들에게서 서태지류의 카리스마나 귀가 번쩍뜨일만한 음악상의 특징도 없었다.
그러나 이 애송이 댄스그룹 H.O.T의 출현은 이후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초대형 사건’이었다.
“아침까지 고개들지 못했지 맞은 흔적을 들켜 버릴까봐/어제 학교에는 갔다왔냐 아무일도 없이 왔나/어쩌면 나를 찾고있을 검은 구름앞에 낱낱이 일러 일러 봤자/안 돼 아무것도 내겐 도움이 안돼.”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이들의 데뷔곡 ‘전사의 후예’.
당시 잘팔리는 히트상품인 랩리듬에다 격렬한 힙합댄스가 혼합된 이 곡은 순식간에 각종 음반시장은 물론 음악챠트를 휩쓸었다.
이들 인기의 밑바탕에는 스타시스템의 치밀한 전략이 있었고 ‘오빠부대’들은 예쁘고 튀는 용모의 다섯전사에게 광적인 지지를 퍼부었다.
그후로도‘에쵸티현상’은 파장이 오래 지속됐으며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문구류나 팬시상품들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김종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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