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원 동지와 동포 여러분! 조국광복과 남북통일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나의 투쟁은 나의 평생을 옥고와 피눈물로 점철케 하더니 민주천하라 일컫는 오늘의 기막힌 현실은 나의 인생의 황혼기를 다시 감옥속에서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1967년 5월 반공법 위반으로 옥중에 갇혀있던 대중당 대표 월파 서민호가 6월8일 실시되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힌 서신의 일부이다.
월파는 그 해 5월의 제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야당 단일화를 명분삼아 사퇴했다. 그러나 대전 유세 이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국가 인정’과 ‘남북 군축 제의’가 빌미가 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월파는 1903년 4월17일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에서 서화일씨와 경주 이씨 사이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월파라는 아호는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떨어지는 달을 치마폭으로 받았다는 태몽 때문이라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친화력이 있는 그의 성격은 학창시절 학업보다는 유도와 권투, 야구 등 운동을 즐겼다. 일본에서 잠시 중학교를 다녔으나 귀국해 중앙학교에 입학하지만 도중에 그만두고 편입했던 보성학교에서도 싸움패에 가담, ‘보성 깜둥이’로 통했다. 월파의 기질은 64년 4월 김준연의 국회 구속 동의안 의결 당시 6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당의원들을 제압한 기량(?) 발휘는 지금까지 일화로 남아 있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입학과 미국 유학 등 화려한 학력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때 상당한 부호의 집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월파의 아버지는 고흥과 벌교 등지에서 삼베장사와 간척사업으로 고흥과 보성, 순천 인근에 많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1930년 일제가 조사한 대지주 명단에도 282정보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월파에게 조국 해방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 순천의 김양수와 함께 조선어학회 운영위원 겸 자금조달책을 맡아 43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른 월파는 벌교 자신의 집에서 해방소식을 듣고 기쁨을 참지못해 엉엉 울어버렸다 한다.
해방정국, 미군이 진주하면서 월파는 미국 유학 등을 통해 익힌 유창한 영어실력을 토대로 사회 전면에 등장했다. 선교사인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미군과 접촉, 전남지역 좌익 척결을 조언한 월파는 미군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46년 6월 광주시장에 임명됐다. 월파의 광주시장 임명에 대해 한국인 고문회의가 거부하지만 미군정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고문위원들이 모두 사퇴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주시장에 이어 월파는 46년 10월 전남도지사에 임명되면서 이 지역 우익진영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전국 도지사들의 전횡을 안재홍 민정장관이 인사를 통해 제동을 걸면서 월파는 강원도지사로 전출됐다. 이에 강력 항의하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자 47년 7월 사표를 내고 이승만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행동대 역할을 했던 대동청년단 전남지부를 결성해 활동했다.
화려한 경력 뒤에는 인생의 좌절도 있었다. 월파의 정치적 첫 시련은 제헌의원 선거였다. 고향인 고흥에 출마하지만 단민당의 유성갑에게 패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로 해방정국에서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를 지낸 월파가 제헌의원 선거에서 어처구니없게도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선거의 낙선 배경에는 도지사 시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좌익에 대한 탄압과 관권개입, 지역의 토호인 유림의 반대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당시 고흥경찰서장은 관권개입이 문제가 되면서 투표일을 얼마 앞두고 경질됐다.
낙선한 월파는 1949년 조선전업(지금의 한국전력)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50년 고흥이 2개의 선거구로 분리된 제2대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고흥을에 출마, 후보중 정동진이 사퇴한 가운데 송경섭을 무난히 제치고 당선됐다.
국회에 입성한 월파는 내무위원장으로 전쟁기간 동안에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52년 4월24일 순천에서 벌어진 ‘서창선 대위 사건’으로 그는 또다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지방선거 시찰을 위해 순천에 온 월파가 지역 유지들과 평화관에서 연회를 열고 있는 도중 동석한 기생을 찾아온 서 대위를 권총으로 사살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과 국회가 대립하면서 비상계엄이 선포됐으며 결국 월파는 사형, 집행유예, 수감 등 우여곡절 끝에 8년간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 있던 월파는 ‘반 이승만 사상’을 고취한다는 뜻에서 손녀의 이름을 ‘치리(治李)’라고 지어주었으며 다음 손자·손녀를 보게되면 ‘치승(治承)과 ‘치만(治晩)’으로 작명하라고 했다 한다.
60년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월파는 22일 석방, 7월의 5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돼 지역 출신의원으로서는 최초로 부의장에 선출됐다. 6대에는 지역구를 서울 용산으로 옮겨 당선됐으나 65년 한일협정비준에 반대하며 사퇴했다.
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 대표로 있던 대중당 후보로 출마중 군정종식을 위한 야당 후보 단일화를 내세우며 사퇴했다. 당시 신민당 후보였던 윤보선 전 대통령은 “그 분이 애국적 결단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며 “서민호 대표의 결단은 국민의 여망인 정권교체를 위해 크게 기여할 것으로 경의를 표한다. 서민호 대표의 희생적 행동에 보답하기 위해 신민당은 정권교체를 통한 민권수호를 위해 그 분과 제휴하여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직후인 5월8일 사퇴전 4월14일의 대전 유세로 인해 구속됐으며 옥중에서 7대 국회의원선거 출마를 표시하고 선거 11일 앞둔 5월27일 보석으로 풀려 나왔다.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신형식을 물리치고 당선, 4선을 기록했다. 신씨와는 71년의 8대선거에서도 대결, 2만3천여표 차이로 패하면서 73년 정계를 은퇴하는 계기가 됐다.
월파의 화려한 정치적 이면에는 보성과 벌교의 지역민들로부터 비난도 뒤따랐다. 농지개혁에 포함된 벌교 인근의 간척지 땅을 놓고 벌인 농민들과의 법정다툼은 대법원에서 월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까지 지역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월파는 74년 사망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교외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는 월파의 묘비에는 “부산 피란정부 때 거창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단장으로 현지 조사중 인민군을 가장한 아군 공격을 받고도 끝내 진상을 파악했으며 그로인해 1952년 제2대 국회 내무위원장 재임중 투옥, 대전교도소에서 8년간 옥고를 치름”이라고 씌여 있다./박상수 기자 pss@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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