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피난처·매만가·재청별서 등 역사적 명소
과거·현재 아우른 남호공원·서당 ‘한


명·청시대 건물이 잘 보존된 서당. 수상도시로 유명한 이 곳은 매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면서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물과 역사의 도시’ 중국 절강성 가흥시

중국 절강성(浙江省) 가흥시(嘉興市). 세계 최대 항구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상해시(上海市)와 맞닿은 곳이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한적한 시골이었다. 주로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 전라도 농촌지역과 거의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밤낮없이 기계음이 들릴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됨)다. 논밭에는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미 포화생태를 이룬 상해의 ‘위성도시’로 눈부신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내년 상해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개발붐이 불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나라 강남’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예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부한 지역이다. ‘물의 도시’로도 알려져 현재 신흥 공업도시로 탈바꿈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없는 지역은 결코 아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해 세계 관광객들이 거의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여기고 있으나 훌륭한 명소도 많다. 상해와 소주·항주의 명성에 다소 밀려 홀대받고 있는 가흥. 그러나 백범 김구(金九) 선생 피난처와 남호(南湖)공원 등 항일독립운동의 한과 혼이 서린 곳이다. 일제에 항거한 한·중 양국 애국 지사들의 우정과 사랑이 꽃핀 지역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관광명소로 서서히 명성을 얻고 있는 서당의 옛 건축물.

▶김구 선생 피난처=가흥시가 지난 1996년 5월 특별비를 지원, 조성한 역사적인 명소다. 남문 매만가(梅灣街) 76호와 일휘교(日暉橋) 17호에 각각 자리잡은 김구 선생 피난처와 한국 임시정부 요원 및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26년간 중국에서 활동했던 김구 선생이 가흥에 머문 기간은 2년남짓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 상해 파견군 육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핵심 요인을 폭사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폭탄의거 발생후 일본은 중국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조직과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현상금 60만원을 내걸고 김구 선생 체포에 혈안이 됐다. 당시 상해에서 활약 중이던 김구 선생은 가흥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가흥 출신으로 유명한 사회 활동가였던 저보성 선생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생명 위협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과 임시 정부 핵심 요인 및 가족들을 이 곳으로 옮겨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중국인들이 못했던 항일 독립운동을 이국 땅에서 폭탄 의거란 방식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이 피신지원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시정부가 남경으로 옮기기 전까지 실제로 김구 선생이 가흥에 산 것은 2년 가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 긴 세월은 아니지만 김구 선생 일생 및 한국독립운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가 김구 선생의 가흥 피난시절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당시 임시정부가 항주나 진강 등지로 옮기지만 가흥이 핵심지였다. 이동녕, 박찬익, 엄항섭, 김의한 등 임정 핵심요인들이 김구 선생과 함께 기거하면서 외교 및 정보수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은 1932년 여름 저보성의 며느리 주가예와 함께 기선을 타고 가흥에서 인근 해염현으로 거쳐를 옮겨 하룻밤을 보낸 뒤 5년간 처녀 뱃사공 주애보의 보살핌을 받았다.
김구 선생 응접실.
김구 선생 응접실.
남호는 가흥의 명승지로 주로 배를 타고 유람하는 곳이었다. 사공은 모두 여자들로 ‘선랑 ’이라고 불렀다. 선랑들은 낮에는 고객들을 배에 태워 남호를 관람시키고 밤엔 주로 선상안에서 생활했다.
김구 선생은 후일 ‘백범일지’에서 “만약 국가가 독립되면 나의 자손이나 나의 겨레는 누가 저 부인(주가예를 지칭)의 이러한 성의와 친절을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주애보에 대해서는 “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부와 비슷한 감정이 생겼으며, 그의 보살핌은 정말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재회할 기회가 또 있다고 생각하면서 배삯밖에 다른 돈을 주지 않아 정말 서운하다”고 회고했다.
이후 김구 선생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가흥 사람에 대한 김구 선생의 애틋한 사랑과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김구 선생 피난처에는 선생의 침실과 응접실, 주방, 관련 인물 사진, 한국 임정요인 안마당 등 주요 유적과 유물, 사료 등이 보관돼 있다.
이밖에 해염현에 있는 김구 선생 피난처인 ‘재청별서’도 꼭 한번 들러봐야 할 곳이다.
광주 21세기 산악회 오종근 회장과 회원, 김만곤 세무회계사무소 직원들이 지난달 17일 가흥 김구 선생 피난처 등을 방문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광주 21세기 산악회 오종근 회장과 회원, 김만곤 세무회계사무소 직원들이 지난달 17일 가흥 김구 선생 피난처 등을 방문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가흥 남호·매만가=가흥 남호공원은 중국 공산당 1차 전당대회가 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10월 대한민국의정원 긴급회의 개최지로도 유명하다.
절강성 정부는 김구 선생 및 한국 임정 요인이 기거했던 이 일대를 2005년 성급문물보호단위로 확정했다. 이에 앞서 가흥시 정부는 이 일대 역사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 대대적인 보수 및 복원에 나서 현재 100여년전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시켰다. 그래서 매만가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관광명소로 서서히 명성을 얻고 있다. 아직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고 있으나 머지않고 관광 필수코스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실제로 광주 21세기 산악회 오종근 회장과 회원, 김만곤 세무회계사무소 직원들이 지난달 17일 가흥 김구 선생 피난처 등을 방문, 항일독립운동과 한·중 애국지사들의 사랑과 우정의 현장을 체험하기도 했다.
김구 선생 피난처 관계자는 “이 일대는 한·중 양국이 일본 침략자를 공동으로 저항하기 위해 서로 친밀한 관계를 과시했던 곳”이라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친선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매만가 거리.
매만가 거리.
▶서당(西塘)=그림같은 수상도시. 일찍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서로 다투던 요충지다. 당(唐)조때 동네가 생겼으며 명(明)조에 도시가 세워지는 등 명·청시대 건물이 잘 보존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물줄기가 많은 이 곳은 매우 빼어난 경관으로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고 있다.
반달같은 아치형 돌다리는 마치 무지개를 보는 듯 하다. 연못에서 작은 배를 탄 채 노를 저으면 모두가 신선이다. 물가에는 푸른 기와를 이고 회색의 벽체를 지닌 건물들이 옛 정취를 그대로 내뿜고 있다.
서당의 명·청시대 건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기와의 마구리인 와당(瓦當). 서당 주민들은 매화와당과 거미와당을 비롯해 다양한 기와의 마구리, 일부 건물지붕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서당의 번영과 평온을 지켜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