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때 영험발휘하며 마을지켜,
말바위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
사라져가는 지역문화를 보는듯 아쉬움이…

고대 문화에서는 돌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다.
족장의 무덤을 거대한 고인돌로 덮었고, 마을 앞에는 선돌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암벽에는 그림과 문자를 새기거나 돌장승을 세워 마을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남근석을 통해서는 풍요와 다산을 염원했고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석불과 석탑이 만들어져 종교적 믿음을 형상화했다. 돌에는 바로 민초들의 뿌리 깊은 문화가 녹아있는 것이다.

곰곰히 따져보면 돌을 신앙적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다. 석불·석탑은 불교에서 기인한 예술성을 자랑하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형상을 쏙 빼닮은 바위나, 선돌, 남근석 등 돌 속에 어떠한 영험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왔다. 이는 주민들의 삶이나 그 지역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장성군 삼서면 석마리 마령마을. 이 마을 또한 그렇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말이 방울을 울리며 혼인집을 찾아가는 형국의 마령. 말을 쏙 빼닮은 마을 뒤 산세와 말바위, 가마바위, 함바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함을 지고 가는 함바위, 이불봇짐을 짊어진 하니바위, 신랑을 태운 말바위, 신부의 가마바위 등 그야말로 결혼식에 가는 행렬이다.
바위들에 얽힌 전설을 제대로 들을 수 는 없었지만 아주 먼 옛날 금기(禁忌)를 어긴 사람들이 굳어져 돌이 됐을 거라 짐작할 따름이다.
이 가운데 하니바위는 유실됐지만 말바위는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마다 정월에 올리는 발바위제(마암제·馬岩祭). 마령의 오랜 전통은 아니다. 원래 주민들은 마을이 생긴 이래 당산목인 600년 묵은 느티나무에 지극정성으로 제를 올렸다. 당산나무의 잎이 무성하면 풍년이요, 나뉘에 잎이 돋거나 적으면 흉년이라 믿기도 했다. 당시 말바위는 그저 하찮은 돌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당산나무와 말바위의 신앙적 의미를 확 바꿔 버린 사건이 6·25전쟁.
이 마을 이장인 노맹철씨(41)는 “당시 마을에 들어와 개고기를 먹은 공비들이 말바위 앞 고랑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에 포탄이 떨어져 모조리 부상을 입었다”며 “이는 말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영험이 있는 증거로 믿어 당산제 대신 말바위제를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신기한 얘기가 입으로 전해져 말바위의 신령함을 구하려는 인근 마을과의 신경전도 잦았다.
즉, 말바위 입쪽에 있는 마을은 자꾸 먹기만하므로 가난해지고 반대편 마을은 부자가 된다고 여겨 주민들은 항상 자기 마을로 방향을 돌려놓기 일쑤였다는 것. 바위의 방향은 돌고돌아 언제부터인지 머리방향이 마령마을로 돌려져 버렸다. 이에 마령주민들은 바위의 방향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차일피일 미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마령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1월14일 오후 마을 은행정 뒤 말바우등에 있는 말바위에서 제를 봉행한다.
지난 1952년 마령·석령 등 다섯마을의 주민들이 ‘마암계’를 조직, 제를 주관했지만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라 5년뒤부터 마령만의 제로 이어져 오고 있다. 게다가 최근 얽힌 전설과 유래 등이 거의 인멸된 데다 제례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제관과 유사를 정하고 제물 준비, 액을 물리치기 위한 복토 등 제례의식과 절차는 다른지역의 제례의식 유사하다.
풍요와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주민들에게 외부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남아 있다.
이와 함께 말바위제는 바위를 통해 소원을 빌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으려는 마령사람들의 문화적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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