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정월(正月)은 그 해를 설계하고, 일년의 운세를 점쳐보는 달이다.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천지인(天地人)이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제의로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하여 동제(洞祭)를 지낸다. 집집마다 정성껏 제수비용를 갹출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제관을 뽑아 풍요로운 농사와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것이 바로 동제인 것이다.
해남군 북평면 묵동마을에 전해오는 헌식제(獻食祭)는 400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돼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월 대보름 달이 떠오르며 시작되는 헌식제 역시 한해동안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다.
다른 지역의 대보름 제례들이 대개 마을 수호신에게 올리는 제의지만 묵동 헌식제는 ‘떠도는 원혼’을 달래는 제의로 일명 ‘망제(忘祭)’라고도 한다.
원래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묵동마을. 옛날 폭풍우가 몰아쳐 인근 어장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많은 어부들이 불귀의 객이 되곤 했다. 희생자들은 마을 해안가로 밀려왔고 주민들은 이들을 안치한 후 제사를 올리게 된 것이 계기. 원혼을 불러모아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헌식제’로 이 마을의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음력 1월 14일 밤, 마을 남자들은 영혼을 부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간다. 굿물(농악)을 치며 귀신들을 맞이해 마을로 인도한다.
이어 15일 오전, 부녀자들은 하얀 소복차림으로 물동이를 이고 마을 뒷산으로 오른다. 불성골 들샘에서 정갈한 물을 길러 제사에 쓰일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한다.
오후들어 마을에 있는 두그루의 당산나무에서 당산굿을, 마을 앞 다리께서 풍년굿, 지신밟기를 한다. 이는 마을의 건강과 평안, 풍년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각 가정에서 각각 준비한 음식을 들고 제단으로 향한다.
대개 다른 지역의 동제들이 유사(제주)를 선정해 음식을 장만하지만 각 가정에서 손수 제사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린 후 제단으로 가지고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유교식을 따르는 제례는 초헌·아헌·종헌순으로 이어지고 주민들은 흥을 돋우는 다양한 놀이를 즐긴다.
잡귀신을 달래는 허허굿과 함께 제사상에 잔을 올리고, 상쇠놀이·장구놀이·북놀이·소고놀이 등 걸판진 놀음을 즐기고 나면 자정무렵.
마지막 순서는 문장걸이(도둑잡이 굿)다. 나쁜 짓을 한 포수를 잡아 처형하는 모습을 재연한 문장걸이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인 것이다.
묵동 헌식제에서 준비과정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굿꾼들이 치장하게 될 고깔과 복장은 주민들이 손수 만든다. 이때 고깔에는 직접 염색한 한지로 꽃을 만들어 붙인다. 복장도 무척 화려하다. 지금은 화학 염료를 이용해 손쉽게 만들 수 있지만 예전에는 풀이나 나무껍질에서 염료를 추출했다.
이 마을 오현철씨(60)는 “60여년 전 한때 망제를 소홀히 한 적이 있는데 천연두가 창궐하거나 늑대가 마을에 자주 내려와 가축들을 해치는 등 마을에 크고작은 불상사가 끊이질 않았다”며 “이후 다시 망제를 꾸준히 지내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고, 현재 인구가 크게 줄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제를 올린다”고 말했다.
결국 묵동 망제는 서로 도우며 마을이 단결할 수 있도록 일체감을 조성하고 평안을 이루고 풍년을 기원하는 소중한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제례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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