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세시기’에 정월 대보름날은 ‘온 집안에 등잔불을 켜놓고 마치 섣달 그믐처럼 밤을 새운다’고 했다.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보름새기’로 각 가정에서는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지만 농경사회의 근간인 마을단위로 협동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가 잇따랐다.
오지마을인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에서 열리는 당산제도 같은 맥락이다. 주민들은 당산제를 ‘별신제(別神祭)’라 부른다.
다른지역에서 열리는 마을 동제와는 달리 그들만의 독특한 대보름 풍속으로 100여년째 이어오고 있다.
유교식 제례절차를 고집하는 운주리 별신제는 마치 불가(佛家)처럼 제단주변에 연등을 내걸고 소원을 빈다.
전국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이들이 섬기는 당(堂)은 세곳. 당할아버지격인 주산(마을 뒷산)의 왕소나무와 ‘동당(東堂)’인 마을 동쪽(오른쪽)의 느티나무(수령 500여년), ‘사장나무’라는 마을 앞 느티나무 2그루가 헌식처다. 가장 먼저 제를 올리는 왕소나무를 주민들은 ‘주산할아버지당’으로 여긴다.
음력 1월 14일 제의준비로 온 마을은 떠들썩하다.
화주집에서 음식은 도맡아 장만하고, 제의전까지 마당에 생솔과 이엉으로 만든 제수실에 잠시 보관한다. 음식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가마모양의 운반도구도 이채롭다. 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해 만든 연등에는 주민들이 원할 경우 자손의 발복을 빌며 이름을 쓰기도 한다. 등은 각 제단주변에 매달아 어둠을 밝힌다.
주민 최영도씨(65)는 “다른 당산제에서는 볼 수 없겠지만 당신(堂神)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굳게 믿고 있어 주민들은 연등을 매달고 소원성취·무병장수·자손발복을 기원한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밤에 교대꾼(음식을 실은 가마를 운반하는 사람)을 인도하게 될 횃불도 관심거리.
긴 대나무 10여개를 묶어 만든 횃불은 호랑이가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대나무와 불을 싫어하기 때문.
당할아버지격인 왕소나무를 시작으로 동당, 사장나무에서 차례로 올리는 제례는 밤 11시께 시작해 새벽 닭울음소리와 함께 막을 내린다.
횃불을 앞세운 교대꾼, 그 뒤로는 제관들과 메구꾼(농악패)들이 따른다. 그러나 메구꾼이나 다른 사람들은 제단에서 멀찍이 떨어져 제를 지켜볼 뿐, 제는 초헌·아헌·종헌관과 축관들의 몫이다. 대신 축관은 아래 남아있는 사람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축을 고한다. 하지만 마지막 사장나무에서는 다함께 제를 지낸다.
온 마을 주민들도 제례를 마칠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함께 지새며 소원을 빈다.
제수품를 준비하는 과정도 지극히 엄숙하다. 용산 5일장에 장보러 나선 화주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말한마디 없다. 게다가 에누리까지 값을 모두 지불한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인다는 의미. 비용은 한 유지가 희사한 논밭에서 거둔 수확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예전엔 집집마다 인원수대로 ‘모릿대전’을 갹출했다.
최씨는 “별신제는 6·25 난리통에도 끊이질 않았다”며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주민들은 지극정성 제를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화, 산업화로 대보름의 의미는 상당히 퇴색했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별신제. 이는 그야말로 ‘하늘의 뜻’에 따라 주민들이 화합과 협동을 다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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