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은 풍파에도 꿋꿋이 이어온 마을공동신앙
400여년 역사 장성의 대표적 당산제
액운 물리치는 호박꽃 초롱등 ‘이채’

농경사회의 공동체 생활에서 시작된 당산제. 마을공동신앙으로 구 한말 당시까지 대부분의 마을에서 제를 올렸다.
그러나 일제치하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따라 당산제는 미신으로 치부돼 곳곳에서 당산목이 잘려 나가는 수난도 잇따랐다.
게다가 60년대 보릿고개로 주민들에게 있어 제는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
요즘은 극심한 이농현상까지 겹쳐 당산제와 같은 지역문화는 쉽사리 찾아보기가 어렵다.
장성군 ·읍 유탕리 당산제는 삼계면 생말(생촌) 오당제(본지 2월 5일자 10면)와 함께 장성지역의 대표적인 당산제.
한때 주민들 사이에서도 미신타파를 주장하며 폐지를 검토하기도 했으나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고 월남에 파병된 마을출신 장병들도 무사귀환한 것은 바로 당산제를 정성껏 올렸기 때문이라고 여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탕(流湯)’이란 지명은 마을 앞뒤로 흐르는 온수통(원수통)과 참시암(참샘)이 있는데 그 물줄기가 마치 여인네의 젓줄기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 처음에는 유탄(乳灘)이라 불렀으나 일제시대 유탕으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당산제는 마을이 생기면서 시작됐다니 400여년은 훌쩍 넘는 셈이다.

당산은 수령 400여년의 느티나무(귀목)인 천륭당산(할아버지 당산)과 마을 가운데의 입석 2기(내당산), 유탕천 옆의 느티나무(수령 400여년)인 외당산이다. 이 가운데 입석은 왼쪽이 할머니 당산, 오른쪽은 며느리 당산(혹은 상당신·하당신이라 함)으로 여긴다. 며느리 당산은 웃시정 팽나무 아래 있었으나 이롭지 못하다 해서 70년대 초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또한, 마을 남쪽에는 수령 300여년의 팽나무가 있는데 연당신(鳶堂神)이라 한다. 옛날에 솟대가 있던 자리로 솟대가리, 솔대가리 혹은 소청거리라고도 한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좋은 것이 흘러나갈 형국이라 제를 지내 막고, 외부로부터의 액이나 잡귀를 막기 위함이다.

제일(祭日)은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
물론 열흘전 4~5명의 제관을 뽑거나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부정은 금물이다. 이 마을은 유난히 엄격하다. 설사 초상이 났더라도 망자는 마을밖에 안치했다 제를 마친 후에 장례를 치를 정도. 제수음식도 양념은 않고 소금만 사용한다. 제례비용은 ‘지붕몰랭이돈(지붕머리돈)’이라 해서 집집마다 쌀 1되를 갹출했으나 70년대 중반부터 동답에서 수확한 이익금으로 충당한다.
14일, 마을 입구와 화주집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한줌씩 놓아 부정을 막는다. 청년들은 밤에 쓸 화목을 모으고 농악대는 기구를 점검한다.
이윽고 밤 8시께.
농악대는 화주집을 시작으로 천륭당~내당산~연당신~외당산 순으로 굿을 친다. 굿은 모두 세차례 치는데 첫번째는 제사지냄을 알리는 소리, 두번째는 강림해 많이 드시라는, 세번째는 제사가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다.
첫번째 굿을 친 후 당산에 불을 밝히는데 대나무 가지로 호박꽃 초롱모양에 백지로 만든 등에 촛불을 켠다.
각 가정에서는 세번째 소리를 듣고 제를 시작한다.
제의 순서는 초헌~축~소지~재배~아헌~재배~종헌~재배~철상이 끝. 상을 치우기 전 도끼로 땅을 파 메를 묻는다. 이 때 떡은 마을 사람들이 골고루 나눠 먹는데 이는 여름에 잔병치레를 막기 위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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