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숨결을 찾아서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비사성 안에 있는 대흑산 주봉

요녕성의 최남단 도시 대련, 필자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해 보았지만 대련에도 고구려산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근년에 필자는 출장과 관광 목적으로 대련을 몇 차례 다녀왔다.

사비성(沙卑城), 또는 필사성(畢奢城)이란 명칭도 갖고 있는 고구려 시기의 비사성(卑沙城)은 현재 대련시(大連市) 금주구(金州區·옛 금주성) 동쪽으로 5㎞ 떨어진 대흑산(大黑山)에 자리 잡고 있다. 대련시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25㎞ 거리다. 비사성이 대흑산 안에 있으므로 대흑산 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산성은 지난 1963년 9월 30일 요녕성 중점 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됐다.

▶비사성 품은 대흑산관광지
대흑산은 백두산 대간을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오는 천산산맥 여맥(千山山脈余脈)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줄기가 한자 산(山)자 형태로 남북으로 뻗어있다. 그 한복판에 있는 주봉은 해발 663.1m로 대련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의 암석과 돌 대부분이 연한 검은색이어서 지금의 이름을 가진 대흑산은 옛날에는 대혁산(大赫山), 대화상산(大和尙山), 노호산(老虎山)으로도 불렸다. 대흑산 동쪽에는 황해(즉 서해), 서쪽에는 발해, 남쪽으로는 대련 경제기술 개발구를 가까이 두고 있고, 대련만을 너머 대련 시가지와 마주보고 있으며 총 부지면적은 10여㎢다.

요동 남쪽지역의 제1명산으로 손꼽히는 대흑산은 말 그대로 험준한 산세, 기암괴석, 역사유적과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갖춘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이곳을 답사하던 날, 우리는 비사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참 헤매다가 대흑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상수도회사 문 앞 경비실에서 길을 묻게 되었다. 경비실 직원이 가리키는 대로 서쪽으로 조금 나아가니 행화리교(杏花里橋)라는 자그마한 다리가 나타났다. 그 다리 옆에 산성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대흑산풍경구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이 길은 조양사, 향수관, 관음각(觀音閣)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비사성 안에 들어가 장대와 석고사(石鼓寺) 등 경관지에 이를 수 있다.

당왕전(唐王殿)이라고도 부르는 석고사는 대흑산 남쪽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수말당초(隋末唐初) 때 울지경덕(尉遲敬德·585~658)이란 장수가 이세민을 위해 축조했다는 석고사는 요남지역의 유명한 불교사찰이다. 해마다 음력 9월 9일이면 이곳에서 묘회(廟會·절간의 재회)가 열린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날 마침 불교행사가 열리고 있어 많은 참배객들로 붐볐다.

당왕전은 왕궁의 건축형식으로 지어 사찰이 아닌 왕궁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정전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좌상이 있고, 왼쪽에는 위징(魏徵·580~643·당조 정치가), 오른쪽에는 서모공(徐懋公·594~669·서세적<徐世績>, 즉 훗날의 이적<李績>)이 나란히 있고, 왼쪽 측면에는 울지경덕과 이정(李靖·571~649·당조 군사가·장수), 오른쪽 측면에는 설인귀(薛仁貴·614~683·당조 명장·군사가)와 장량(동정행군대총관으로 비사성 공격을 주도)이 각각 서로 마주보고 있다.

당 태종이 대군을 친솔해 요동지역을 공격할 때 비사성에는 직접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곳에 당왕전이 세워진 것을 보면 아마도 당 태종의 요동수복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흑산에는 옛 고구려산성 비사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유교의 분위기가 짙은 여러 사찰들이 함께 모여 공존하며 대자연과 서로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는데 ‘금주 옛적의 8경(八景)’ 중 이 산이 네 가지를 차지하고 있다. 비사성의 ‘산성석조(山城夕照)’, 승수사(勝水寺)의 ‘남각비운(南閣飛雲)’, 향수관(響水觀)의 ‘향천소하(響泉消夏)’ 등 경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향수관은 향수사(響水寺) 또는 운수사(韻水寺)라고도 하며 대련시의 유명한 도교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나라 때 건축됐다고 하며 명나라, 청나라 때 여러 차례 보수했다고 한다. 대흑산 서북 측에 위치한 향수관 산문을 들어서면 정전과 후전이 보인다. 정전 울안에는 못이 있고 아름드리 고목 5그루가 서 있다. 정전 오른편에는 요금동(瑤琴洞)이라는 40m 깊이의 천연 동굴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와 북쪽으로 사찰 바깥 벽 용구(龍口)를 빠져나가 못 속의 벽섬구(碧蟾口)로 소리를 내며 쏟아지므로 향수관이라 했다고 한다. 뙤약볕이 사람을 태우는 듯한 여름철에 향수관 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차가운 공기를 퍼뜨리며 솟아나는 요금동 샘물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어 사람들의 시원하고 후련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곳이 바로 ‘금주 옛적의 8경’ 중 ‘향천소하’다.

▶지장보살은 신라국 왕자
대흑산 입구에 들어서서 비사성으로 가려면 먼저 만나게 되는 사찰이 조양사(朝陽寺)다. 조양사는 명나라 때 지은 것으로, 여기에 산수가 아름답다해 원래 명수사(明秀寺)라고 불렀는데 청나라 옹정 6년(1728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사찰은 명·청 시기를 거치면서 몇 번이나 보수했다. ‘문화혁명’ 때 파손돼 1994년에 복원해 정부에서 지정한 불교활동 장소가 됐다. 조양사는 요남지역의 유명한 불교사찰의 하나로, 해마다 음력 4월 18일이면 이곳에서 묘회가 열린다.

반듯한 남향 건축인 조양사의 앞뒤 두 산문은 모두 구릉꼭대기에 있고, 전당은 뒷산 양지 비탈에 세워져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산 하나는 등에 업고 다른 한 산은 품에 껴안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음(陰)을 엎고 양(陽)을 안고 있다고 한다. 천지가 빙설세계로 된 엄동설한에 흩날리던 눈발이 멈추고 날이 개어 사찰 주변의 숲과 나무들, 절문과 그에 이어진 담벼락 위로, 그리고 사찰 건축물의 지붕들이 눈부신 햇빛 아래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금주 옛적의 8경’ 중 하나인 ‘조양제설(朝陽霽雪)’이다.

조양사에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 곳을 둘러보았다. 조양사 주 건물인 대웅보전을 들어가 보니 전당 한가운데 석가모니부처의 좌상이 있고 그 왼쪽에 지혜(智)를 주재(主宰)하는 문수(文殊)보살, 오른쪽에 덕행(行)을 주재하는 보현(普賢)보살이 나란히 있다. 왼쪽 측면에는 슬픔(悲)을 주재하는 관세음보살, 오른쪽 측면에 정성(愿)을 주재하는 지장(地藏)보살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지장보살은 신라 국왕의 아들로서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흑산 조양사를 소개한 현지 자료에는 지장보살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신라국 왕자로 태어났는데 성은 김씨요, 이름은 교각(喬覺)이다. 어릴 때 출가해 스님이 됐으며 당 현종 때 구화산(九華山)에 와 수련했다. 99세에 입적했는데 3년 후에 관을 열어 보니 육신은 탄력이 있었고 얼굴빛이 살아 있는 듯해 모든 승도들이 신기해 마지 않으며 그 시신을 탑 속에 봉안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가 놀라워하는 ‘지장육신탑(地藏肉身塔)’이다. 이 탑은 안휘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 화성사(化城寺) 서북쪽 신광령(神光嶺)에 세워져 있다. 명나라 만력(萬歷) 황제는 ‘호국육신지탑(護國肉身之塔)’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음력 7월 15일은 지장보살의 탄생일이며, 7월 30일은 지장보살의 성도(成道)일이다. 이 날이 되면 각지에서 수많은 참배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육신탑 앞에서 향을 피우며 무릎을 꿇고 예배한다. 독실한 신도들은 밤낮으로 탑을 돌며 염불을 하는데 그 장면이 장관이다….”

지장보살이 입적한 후 1천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지역에서는 김교각 스님을 ‘지장왕 보살’로 받들면서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장강 유역에는 가는 곳마다 지장왕묘, 지장암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장보살을 숭배하고 있다.

구화산의 99개 봉우리와 99세로 열반한 지장보살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그곳에는 높이 99m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지장스님 청동불상이 세워져 있다.

지장보살(인형)을 모셔놓은 대흑산 조양사에도 지장보살 기념일이 되면 주변지역 신도와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행사에 참가해 지장보살께 정성을 드리며 소원을 빌곤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