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규 글/ 김복룡 그림

불도(佛徒)인 그는 절에 가면 십우도(十牛圖)부터 찾곤 했다.
그러나 십우도는 아무 절에나 있는 흔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비로소 제
대로 그려진 십우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치(有治) 보림사(寶林寺)에서였다. 십우도란 불
도를 수행하는 과정 즉, 입문에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10 단계로 그린 탱화를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노닐고 있어야할 소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산다. 말하자
면 이 험난한 세파에서 무구한 노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게 또 하나의 나, 그 참다운 나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숙제(話頭)를 가진다. 그 참마음을 어떻
게 가져 올 것인가 하고, 누구는 산중 절간에서 그 숙제를 끌어안고 명상의 세계로 들어가
고, 누구는 이 세상 이 현상 안에서 부딪치면서 일어나면서 생활인으로서의 생활선(生活禪)
을 추구하는 것이다.’ (백금남 구도소설 십우도, 작가의 말)
십우도는, 소를 찾아 헤매는 그림이므로 심우도 (尋牛圖)라고도 불린다.
그림을 보면 1, 심우. 2, 견적(見跡) 3, 견우(見牛). 4, 득우(得牛). 5, 목우(牧牛). 6,기
우귀가(騎牛歸家). 7,망우존인(忘牛存人). 8, 인우구망(人牛俱忘). 9, 반본환원(返本還源).
10, 입전수수의 10단계를 순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를 풀이하면 출발과 포
착, 만남, 획득, 가꿈, 귀환, 지움, 행굼, 환원, 종횡무진한 삶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림사를 찾은 날은 지난 초파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인 1951년 3월 11일
경, 6·25 전란 때 소실된 보림사의 중건 작업이 최근에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을 찾은 김에 들른 거였다. 보림사는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한다. 신라 불교는 교종
과 선종으로 분류되는데 보림사는 선종(禪宗) 구산(九山)의 종주 격인 가지산파의 수련 도
장이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부속 사찰이 수 십 채가 넘어 되는 대가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림사 아래 마을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보림사 뒤 가지산에는 차나무와 비자나무
가 무리 지어 무성하였다. 봄이면 차순(茶筍)을 따는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올랐고, 가을이면
비자 열매를 주우러 마을 또래들과 어울려 제 집 드나들 듯 하였다.
이렇듯, 보림사는 그의 유소년기 추억의 온상이기도 했다. 보림사는 6·25때 공비(共匪)
의 지휘부가 주둔하였으므로 경찰토벌대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보림사는 종내 전란의 희생
물이 되고 말았다. 그는 보림사가 불타는 장면을 멀리서나마 목격한 산 증인이기도 했다.
토벌대와 공비가 공방전을 펼치는 와중인지라 목숨 보존을 위해 보림사 부근 산 속에 은신
해 있다가 상황을 목격한 거였다. 보림사가 불타던 날 매캐한 잿불 내음은 천지에 가득하였
고, 시커먼 연기는 가지산 산자락을 송두리째 뒤덮었으며, 기왓장 깨지는 소리는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웅장하던 대규모의 사찰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그 와중에서도 유일하게 사천왕각만 달랑 살아 남았었다.
사천왕각에는 동방을 수호한다는 지국천 (持國天), 서방의 광목천(廣目天), 남방의 증장천
(增長天),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들은 하나 같이 험상궂은 얼굴로
방천화극이며 장검 같은 무기를 꼬나들고 있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
그런 위엄으로 사천왕들은 화를 면한 듯싶었다.
보림사에는 국보와 보물이 수없이 많다. 국보 117호인 철제(鐵製)비로자나불 좌상도 그 중
의 하나이다. 비로자나불은 불에 거멓게 그을려 난전에 나앉게 되었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가건물을 지어 보존하였었다. 오랜만에 복원된 대적광전에 의연하게 자리잡은 비로자나불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뇌리에 어릴적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그는 추억을 반
추하다 말고 십우도를 찾아 나섰다. 대적광전 뒤 벽에서 십우도를 발견한 그는 환호하며 발
걸음을 멈추었다. 벽화는 얼마 전에야 완성된 듯, 페인트 냄새를 물씬하게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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