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숨결을 찾아서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최진보마을에서 바라본 산성 전경

요북 최대의 성 최진보산성①.
최진보(催陣堡)산성은 요동 북부지역에서 규모가 제일 큰 고구려산성이다. 이 산성은 철령(鐵嶺)시에서 동남쪽의 무순(撫順) 방향으로 약 17㎞ 나아가 이천호진(李千戶鎭) 소재지인 최진보마을 서북쪽 약 1.5㎞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시기 이 산성의 이름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같지 않지만 ‘남소성(南蘇城)’이란 요녕성 권위 고고학자의 주장이 유력해 보인다.

철령에서 무순으로 가는 성도(省道)를 따라 고구려 옛 성 청룡산산성(靑龍山山城)이 있는 장루자(張樓子)마을을 지나 동쪽으로 현도(縣道)에 진입, 영반촌(營盤村)을 지나면 최진보마을에 이른다. 마을입구 신작로 옆에 서최(西催)란 마을표지판이 서 있다. 최진보마을은 서최와 동최(東催) 두 행정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최진보향(鄕) 정부가 원래 이곳에 있었다. 몇 해 전 이 향은 이웃하고 있는 이천호향과 통합되어 이천호진(鎭)으로 고쳤다.

서최마을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주변사람들에게 이 고장 옛 산성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진씨라는 식당 주인이 마을 뒷산에 어느 때의 것인지는 모르나 옛 성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관음각(觀音閣)이 있어 한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산성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식당 옆에서 뒷산으로 뻗어나간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성에 가보기로 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너비가 수십m 되는 강이 나타났다. 강위로 난간이 달린 간이 쇠다리가 하나 있었다.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지날 수 있는 좁은 다리였다. 강 너머 보이는 밭을 일구기 위해 동네에서 설치한 다리인 듯싶다. 그 다리 위에서 마침 강북쪽 밭에서 일하고 마을로 돌아오는 한 사내를 만났다. 우리가 이곳 산성을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자 손씨라는 이 사내는 이 고장 산성이 바로 고구려산성이고, 그 안에 관음각이 있다는 것과 설인귀가 요동을 정벌한 전설만 이야기할 뿐 그 산성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손씨는 우리 발 아래 흐르는 강이 범하(汎河)이고, 이 강이 옛날에는 지금보다 넓고 깊었다는 것과 이 다리 너머에도 원래 몇몇 인가가 살았는데 장마가 지면 물에 잠기곤 해 강남 쪽의 최진보마을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우리가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있는 흙길을 따라 강역을 지나 서북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동서로 이어져 뻗어나간 산줄기가 끝없이 펼쳐진 평야 한켠(북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산줄기 남쪽 가파른 기슭 아래에 범하(汎河)가 흐르고 있으며 그 위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시멘트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최진보산성 입구다. 동남쪽에서 흘러온 범하는 산성 남쪽기슭 낭떠러지를 따라 서쪽으로 흘러가다가 철령시 서남쪽에서 요하강에 유입한다. 손씨의 말대로 옛날에 물이 깊고 넓은 이 강이 최진보산성의 방어역할을 할 수 있는 천연적인 ‘해자’가 틀림없었다.

산성 입구는 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다. 남문은 산성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높이 12m, 길이 70m 되는 인공으로 쌓은 토산(성벽)이 산성 남쪽 골짜기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토산 서쪽으로 성문(정문)이 나 있고, 동쪽으로는 배수구가 있었다. 이 토산이 마치 골짜기 입구에 설치된 커다란 대문 같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관문산(關門山)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남문은 안팎으로 옹성 형태를 한 특이한 구조로 너비는 5m, 길이는 20m가량으로 아주 견고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옹성문 서남쪽으로 성벽이 37m 뻗어나간 곳에 작은 협문(夾門) 하나가 은폐돼 있었다 한다. 이는 남문과 함께 산성을 드나드는 중요한 문으로 숨겨져 있었으므로 ‘암문(暗門)’이라고도 불렀다.

산성 입구에 들어서니 비교적 넓은 골짜기가 나타나며 그 중간으로 수레길이 북을 향해 나 있었다. 입구 오른편으로 성급 문화재보호단위 ‘최진보산성’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은 와식(臥式)으로 된 것인데 윗면이 길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성안의 관음각

원래 이 산성 표지석은 길 왼쪽에 입식(立式)으로 만들었던 것을 후에 새로 만들면서 길 오른쪽에 세운 것이다. 표지석에 새겼던 산성 이름도 원래는 ‘최진보산성’이 아닌 ‘고구려산성’으로 되어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길 아래쪽 도랑에 원래의 입식표지석이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이 표지석을 왜 새로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표지석에 새긴 글자도 원래대로 ‘고구려산성’이라면 지역성을 무시한 반면에 고쳐진 ‘최진보산성’은 역사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관광객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이 표지석 옆에 다른 간판을 세워 간략한 설명을 곁들이거나 표지석 명칭을 ‘고구려최진보산성’ 또는 ‘최진보고구려산성’이라고 밝혔으면 더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기서 조금 위쪽으로 들어가면 길 오른편으로 자그마한 청벽돌 건물이 눈에 띈다. 갓 지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당시 사람들의 말대로 토지신을 모신다는 토지묘(土地廟)였다. 그 왼편으로 길 너머 살림집인 듯한 다세대 붉은 벽돌집 한 채가 보인다. 마당에 30대의 젊은 여인이 보여 말을 걸었다. 건물에 대해 묻자 그녀는 이 성 안에 살고 있는 관음각 도승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했다. 정씨라는 여승은 지난해 출가했는데 아직까지 부모들도 이 상황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관음각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자진해 안내하겠노라며 도복을 갈아입고 나섰다. 관음각으로 가는 길에 용왕전(龍王殿)을 지난다. 용왕전 역시 토지묘와 마찬가지로 자그마한 건물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이는 산물을 다스리기 위해 용왕신을 모셔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 옆에 우물 하나가 보였다. 우물에 비닐관이 하나 꽂혀 있는데 이 관은 방금 지나온 도승들이 주거하는 집으로 이어져 있었다. 시멘트 뚜껑으로 덮여 있는 이 우물은 고구려시기의 옛 우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물맛도 좋다고 했다. 이러한 옛 우물이 위쪽 관음각 옆에도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성안에 옛 우물이 두어 개 더 있지만 대강 위치만 알고 있을 뿐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고 했다.

길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200∼300년은 되었음직한 노송 몇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 건물 몇 채가 보였다. 이곳이 관음각이라고 했다. 관음각은 3m 높이의 단 위에 있었는데 그 양 옆으로 관음각보다 약간 낮은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호법전(護法殿)과 조사전(祖師殿)이었다. 그 앞으로 편전이 각각 하나씩 있어 ‘ㄷ’자형의 아담한 정원을 이루고 있었고 작지만 나름대로 정취가 느껴졌다.

정씨 여승이 관음각 문을 열어준다. 그 안에는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비롯해 여러 보살상을 모셔놓았는데 이는 후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관음각 안 양쪽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낡아 희미해져 있었고, 그림의 형체는 일부만 알아볼 수 있을 뿐 절반 이상이 훼손되어 있었다. 여승은 이 관음각의 건물과 관련한 그림이라고 했다. 이 건물은 청나라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연대의 것인지 그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관음각 서쪽 산기슭에 세워진 돌비석에 따르면 이 사찰을 중수한 시기가 청나라 도광(道光)10년(서기 1831년)이라고 하니 사찰이 세워진 연대는 훨씬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건물은 바깥 벽면에 페인트로 덧칠을 했을 뿐 주춧돌이나 기둥 등의 상태로 보아 처음 지을 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양옆 호법전과 조사전에도 들어가 보았다. 이 두 건물은 후에 지은 것이었다.

관음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관음각 뒤편에 태상로군(太上老君)으로 보이는 듯한 석고상을 비롯해 석고상 3기가 있었는데 안치할 건물이 없었던 듯 간이 지붕만 씌워놓았을 뿐이었다.

현지 사람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 도교사찰은 작기는 하지만 역사가 꽤 길고 법술이 높은 이름난 도승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향내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최진보산성은 동서로 뻗은 청운산(靑雲山) 산맥의 중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관음각산성(觀音閣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산성은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주요 골짜기와 이 골짜기를 주축으로 각각 양측으로 대칭이 되게 뻗어나간 세 갈래의 골짜기, 즉 두도구(頭道溝),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를 통틀어 ‘관음 골짜기(觀音溝)’라고 한다. 방금 우리가 둘러본 청나라 시기의 옛 관음각에서 유래한 이름인 듯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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