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城(87)=영암읍성(靈岩邑城) 梁達四장군, 喪中에 을묘왜변 邑城사수軍令旗꽂자 물 솟은‘장독샘’지금도 철철한국 전통 읍성 성곽 특징…복원 필요성

월출산 자락에서 흘러내려 멈춰 선 ‘토종의 도시’ 영암. 이 곳엔 한국전통 읍성 성곽의 특징을 지닌 영암읍성이 자리하고 있다. 영암을 부화하듯 품고 있는 읍성(邑城)의 축성 연대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각종 문헌을 종합해 보면 1418~1450년께 시축(始築) 된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암읍성 순례를 위해 여장을 챙겼다.

 

# 읍성과 양달사 장군

영암읍성은 왜구 침입으로부터 성을 지켜낸 임란의병 양달사(梁達四) 장군의 충정이 서려있다. 그의 흔적은 영암읍 서남리 삼거리에 있는 ‘장독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름부터가 특이한 이 샘은 일명 ‘장군정(將軍井)’이라고 불리는데, ‘장독’은 ‘장군을 표시하는 기(旗)’에서 유래된 말이다. 을묘왜변(일명 달량진 사변=삼포왜란 이래 일본에 대한 세견선에 고난을 받아온 왜구들이 1555년 5월 배 60척을 이끌고 달량진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커다란 왜변) 당시 양달사 장군이 그의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는데서 연유됐다.

샘의 주인공 양 장군은 제주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1519년 영암군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현감을 지냈다가 1555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왜구들은 1552~53년에 걸쳐 제주를 노략질하고 1555년 5월 6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량진(현재 해남 북평면 남창)에 들어와 위세를 떨쳤다. 이 때문에 당시 영암군수 이덕견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고 항복,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됐다.

영암읍에서 9km 거리에 있는 봉호정(鳳湖亭)에 내려와 있던 양달사는 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쩔 바를 몰랐던 그는 부제학을 지내고 있는 사촌동생 양서정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양서정은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즉시 형 달수(達洙)와 동생 달해(達海)·달초(達礎)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영암읍으로 향했다.

이미 읍내로 들어온 왜구와 3일간의 피비린내나는 격전을 벌였다. 당시 관군은 완산부윤 이윤경(1498~1562)이 인솔했다. 연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어 군량미와 음료수가 고갈돼 큰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양 장군이 군령기를 높이 들어 호령한 뒤 땅을 내리치자 신기하게도 ‘꽝’하는 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꽂았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이에 군사들은 사기충천해 왜적을 물리치게 되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양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왜변은 진압됐으나 자신은 상중의 몸으로 출전한 것이라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에게 그 공을 모두 돌렸다. 결국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감사에 이어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양 장군은 이 전쟁에서 왜구의 창에 등을 찔린 부상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가 3년 시묘를 마친 뒤 결국 여독으로 41세 되던 1559년 세상을 떴다.

양 장군의 충정이 뒤늦게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가 죽은 지 100년만에 좌승지로 추증하고 충신으로 정려해 그의 정신을 기렸다.

 

# 연혁 및 규모

영암읍성은 영암읍 서남리~교동리 일대에 있는 분지형 읍치성(邑治城)이다. 15세기 조선 문종대(1450~1452)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의 성축(城築)을 그대로 유존(遺存) 시키고, 주로 부속 시설을 보완하였다. 읍성의 규모는 둘레 4천369척, 높이 12척이며 성 안에 2개의 샘이 있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당시의 유적 현황을 살필 수 있다.

그후 ‘신증 동국여지승람’(1530)에는 ‘둘레 4천369척, 높이 12척, 성 안에 4개의 샘이 있다’라고 하여 약간의 수축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지’(1656)의 기록에는 동·서·남·북문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지도서’(1760)에는 성내에 2개의 연못과 4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1830년대의 ‘영암군지’에서는 동·서·남문 등 3문 만이 기재되어 있고, 연지(蓮池·둘레 470척), 덕곡지(德谷池·둘레 210척), 적후지(赤後池·둘레 200척) 등 3개의 연못을 추가로 기록하고 있다.

영암지역 촌로들에 따르면 영암읍성의 동문은 영암시장 입구에, 서문은 옛 영암중학교 터, 남문은 영암경찰서 일대, 북문은 역리 부근이었다고 한다.

영암읍성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교동리 KT 건너편에 150여m만이 남아 당시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사진/ 오재만 문화유산사진연구소장

<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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