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城(85)=고흥 흥양현성(興陽縣城)

1445년 축성, ‘500년 古邑’고흥의 탯자리
홍교·우물터·성곽 현존…역사성 간직

‘유자골’고흥이 오늘날과 같은 영역을 갖추고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초의 일이다. 백제시대 이래 몇 개의 현(縣)으로 나뉘어 존속되어 오다가 조선왕조에 들어 군현제(郡縣制)를 합리적으로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세종 23년(1441) 남양현(南陽縣) 등을 병합, 흥양현(興陽縣)이라는 독자적인 행정 단위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고흥의 뿌리가 된 흥양현성의 옛 모습을 더듬었다.

 

 

# 흥양현의 역사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일대에 걸쳐있는 흥양현성(興陽縣城). 흥양현(고흥현)은 본래 장흥부 묘부곡(猫部曲)이었다. 충열왕 11년(1285) 몽고어에 능통했던 이 곳 출신 류비(柳庇)의 공으로 부곡에서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감무(監務)가 설치되고 고흥현으로 고쳐 불러졌다. 그러다가 조선 태조 4년(1395) 왜구로 인하여 보성군의 속현인 조양(兆陽)으로 치소(治所)를 옮겼다. 이어 태조 6년(1397) 조양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 21년 12월 의정부에서 전라도 고흥현성을 보성의 임내(任內)인 남양현 저천리(苧川里)로 옮기고 조양진을 고흥현에 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결정이 내려져 조양진에서 남양현으로 천읍(遷邑)을 보았다.

이어 세종 22년(1440) 7월에 도순찰사(都巡察使) 정연(鄭淵)을 현지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세종 23년(1441) 2월 치소를 두원현에 속했던 봉황암의 서쪽 즉 지금의 흥양현성 자리로 옮기고 명칭도 흥양현(興陽縣)으로 개칭되었다.

흥양현성은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후 곧바로 축성작업에 들어가 1445년 5월 무렵 대부분의 성 시설을 갖추었다. 한편 미완된 성곽 시설의 일부는 1451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흥양현성의 둘레는 3천500여척, 높이는 평지가 12척 높고 험한 곳은 9척이었으며, 여장은 높이 3척에 모두 574개소, 적대(敵臺) 11개, 문은 2개소였다. 옹성이 없으며 성 안에 5개의 우물이 있었다. 해자(垓子)는 파지 못했다고 보고되었다. 이 때까지도 옹성과 해자가 미완성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 縣의 행정

흥양현에는 현감 밑에 호장(戶長)을 비롯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방(工房)이라는 속료가 현감의 행정을 도왔다. 그리고 이들의 보조기능을 수행하는 도화원(都畵員), 의생, 군기색, 호적색, 각종창색, 진상색, 금위색, 전궐색, 봉수색, 지소색(紙所色), 고마색(雇馬色), 진휼색, 객사색(客舍色), 수군색, 금송색(禁松色), 영수색(營需色) 등이 있었다.

이러한 향리직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세분되어 갔는데 이는 지방행정업무의 분화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후기에는 향리의 과다로 새로운 직과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후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여지도서’에 의하면 흥양현에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20명, 아전 41명, 지인(知印) 12명, 훈도(訓導) 6명, 관노(官奴) 15명, 관비(官婢) 20명, 사령(使令) 22명의 기록이 보인다.

현의 하부조직에 면리제(面里制)가 있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의하면 경외(京外)는 5호를 1통(統), 5통을 1리(里)로 하고 몇 개의 리를 합하여 면(面)을 만들고 통에는 통주(統主), 리에는 리정(里正),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각각 둔다 하였다.

 

 

# 縣의 군사조직

조선 초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군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태조 4년(1395) 고흥현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한 때 보성군 조양현(兆陽縣=조성)에 피난하여 살았으나 얼마 후 안정됨에 따라 태조 6년(1397), 고흥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하여금 현감을 겸직케 하다가 세종 5년(1423) 다시 첨절제사로 고쳤다.

당시 흥양은 중익수령의 위치에서 병마첨절제사를 두었으며 이러한 3익 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선구적인 조처가 되었다.

세조 원년(1455)의 군익체제(軍翼體制)에서 전라도는 전주도, 남원도, 순천진, 나주도, 흥양진, 옥구진, 부안진, 무장진, 제주도, 함평독진(咸平獨鎭)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흥양진은 당시 중익에 속해 있었다.

이때 흥양현은 사도첨사진영의 관하 3개 만호(萬戶=발포, 여도, 녹도)를 합한 수군은 모두 1천607명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흥양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 현재 300여m 성곽과 2개의 홍교가 남아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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