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강물로 330여년을 흘러온 ‘푸른 정신’

▲ =1670년 장창우 건립…인재 양성·도학사상 요람

옷깃을 파고 드는 초겨울 바람 탓에 수요일 오후가 잔뜩 움츠려 있다. 오늘 같은 날은 훌훌 잠념을 털고 빈 들판으로 나가자.

광~송간 공항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보면 세하동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나온다. 아직 갈색 빛이 채 가시지 않은 들녘엔 겨울이 먼저 와 있다. 하루하루의 햇빛과 바람이 허실없이 이 들판을 익게했을 지난 가을의 풍성한 시간들을 되뇌이며 ‘만귀정(晩歸亭)’을 찾는다.

‘만귀(晩歸)’,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까. 정자의 이름대로 만귀정엔 넉넉함이 고여있다. 주변엔 아름드리한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그러하고, 삼나무, 단풍나무, 해송, 벽오동, 왕벚나무, 해송 등이 운치를 덧씌워 주고있다.

이 정자는 지금으로부터 330여년 전인 1670년께 남원 출신 만귀 장창우 선생(晩歸 張昌羽)이 광주 서구 세하동에 둥지를 틀고, 지역 인재 양성과 도학사상을 펴기위해 지은 초막이다.

만귀정은 커다란 연못에 안에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墨菴精舍)’가 나란히 늘어서 있어 그 어느 정자에서 느낄 수 없었던 정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정자는 1934년 중건(重建)을 거쳐 광복이 되던 1945년 현재의 정면·측면 2칸에 팔작 지붕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만귀 선생이 그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여겨진다. 광주시 문화재 자료 5호로 지정된 만귀정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논하고, 나아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곳으로써 지역 유림들의 사랑방이 됐다.

만귀정 계단을 내려와 연못의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이 있다. 이 곳은 1960년에 만귀 선생의 7세손 묵암 장안섭(墨菴 張安燮)이 지은 것으로, 사방 1간짜리 작은 정자다. 그 단촐함이 사람을 끈다. 정자의 미덕은 개방성이다. 사방으로 열려 너른 들과 낮은 산과 키 큰 나무와 하늘과 바람을 모두 안고 있다. 누구라도 발 들여놓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정자이다. 오순도순 모여앉은 사람들 사이엔 얘기꽃이 벙글어지고 때론 노래가락이 흥겹다.

그렇듯 다수운 자리인 정자가 바로 옆에 하나 더 있다. 큰 나뭇가지 하나가 저편으로 건너려는 듯 기울어있는 다리를 또 하나 건너면 ‘묵암정사’가 있다. 그 정자에 올라 난간에 기대앉아 본다. 오래 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이제 조금 지친 그런 사람의 마음이 된다. 옛사람이 있어 여기 앉아 저 산을 보았을까. 저 물속의 산그림자를 보며 해지는 풍경에 마음이 스산했을까. 고요하다. 이따끔 연못 속의 물고기들이 입 내밀어 뻐끔거리는 소리로 이 연못은 더욱 고요하다.

만귀정에 걸려 있는 40여편의 시 현판 가운데 정자의 주인 만귀 선생의 시 8경이 눈에 들어온다.

-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용강에는어부들의 불 빛이 있네)/ 馬山淸風(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

/ 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野外長江(들밖에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에는 중건상량문, 중건기, 중수기 등과 만귀정 원운, 팔경 등의 많은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경내에는 만귀정시사 창립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 곳이 문인들의 활동 무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晩歸, 깊어가는 겨울 초저녁 하나 둘씩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제집을 향해 발걸음이 바쁘다. 지난 여름의 범람과 가뭄, 그렇게 함부로 출렁였던 마음의 물결을 가라앉히고 제 자리를 찾아 흐른다는 겨울 강물처럼 그렇게 오늘은 깊어지고 있다. 그림/ 한국화가 장복수 글

<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