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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갗 애는 눈보라 속 대나무 기개 간직

▲ =기정진 제자 문용현의 학통 초막지어 계승

 

모진 폭풍한설에도 그 절개를 꺾지 않는다는 대나무, 그래서 예로부터 지조있는 선비를 일컬어 ‘대나무’로 불리웠던 것일까. 광주 인근에도 이러한 대나무의 절개를 빗대어 지어진 정자가 있다. 바로 광주시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초입에 서 있는 균산정(筠山亭)이다.

이 정자를 찾아 떠난 날은 때마침 눈발이 소금처럼 흩뿌려졌다. 듬성 듬성 쌓아놓은 짚다발과 해충 방제를 위해 불을 놓은 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겨울 들판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는 듯한 아늑함까지 안겨준다.

경렬사를 지나 얼마나 달렸을까. 제4수원지 방향을 향해 가다보면 ‘신촌마을’이란 석비(石碑)’를 만날 수 있다. 이 표지석을 끼고 돌면, 마을 저편으로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는 균산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자 밑으로 돌바기 아이의 눈망울 만큼이나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그 위에 균산정이 아름다운 자태로 길손을 맞고있다.

사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그리 오래 되지않았다. 그러니까, 한말 때 이 마을 출신의 선비 해사 문인환(海史 文仁煥·1863~1930) 선생이 1921년에 건립했으니, 80여년 이쪽저쪽에 이른다.

그러나 균산정의 건립 정신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을 떨쳤던 균산 문용현(筠山 文龍鉉)의 유지를 받아 그의 아들인 해사 문인환이 건립했다.

균산은 노사(蘆沙) 선생의 제자로 죽파재(竹坡齋)라는 문각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한 당시의 처사(處士)였다. 특히 정자의 옛터는 균산의 5대조(五代祖) 성제공 필상(惺齋公 弼尙·1671~1735)이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인지라 더욱 그 역사성이 깊다.

훗날 해사는 초막을 지어 아버지의 학문을 이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균산이 작고한 지 36년 만에 비로소 이 터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그의 선친 균산의 호를 따라 ‘균산정’이라 명하였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균(筠)은 대나무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살을 보호하는 겉 살갗을 이르기도 한다.

균산정의 구조는 도리 석초,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간, 측면 3간의 아담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자 입구에 단간 와가(單間 瓦家)의 정문이 있고 정면 또는 좌측 전면에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의 ‘균산정’이라는 대서 판각이 걸려 있다.

또 정내에는 정자 주인 문인환의 정기(亭記)와 정운(亭韻)을 비롯한 22개의 판각이 걸려 있고 전면 좌우의 기둥에 10개의 주연이 부착되어 있다.

정자의 한 중앙에는 다른 정자와 달리 네 개의 기둥이 별도(別途)로 건립하여 판자 마루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의 거실이 꾸며져 있고, 그 위에 이층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 좌측에는 석축 토담이 둘러 있고 그 옆에 노암괴석이 있으며 담밖 열 걸음정도의 거리에 죽파재가 있다. 또 죽파재 위에 괴양정이, 그 위에 서석단이라는 단소가 있다.

이러한 여러 시설들은 현재 남평문씨(南平文氏) 신제공파(愼齊公派)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있다. 그림/ 한국화가 장복수 글

<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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