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효·예 바탕으로

▲ =구국의 정신 되살려내

▲ =1691년 읍취정 정신 이어 이계익 선생 건립

▲ =도심 속 정자 눈길…노사 기정진 학통 이어

흔히 정자(亭子)라 하면, 풍광이 수려한 강가 절벽이나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산 속에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쯤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자 문화에서 발원된 정신은 한결같이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니, 설사 정자가 산 속에 있으면 어떻고, 도심 복판에 있으면 또 어떠하랴.

오산정(梧山亭), 이 정자는 한말 때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다 붙잡혀 대마도에 유배, 스스로 음식을 거절해 굶어죽은 문신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의 뜻을 받들었던 송천 이계익(松泉 李啓翼·1878~1946) 선생이 건립했다. 오산정은 현재 행인들의 왕래가 잦은 광주시 북구 오치동 오치우체국 옆 주택단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

밀려드는 현대문명 속에서 도심 한 켠을 지키고 있는 오산정은 심산유곡에 건립된 정자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해 오고 있다.

오산정의 역사는 인근(현 오치농협 자리)에 있었던 읍취정(현재는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읍취정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읍취 이방필 선생의 후손들이 읍취의‘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1691년 건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읍취정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명했다 하니, 이방필 선생의 인품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읍취정의 정신은 훗날 오산 이용헌(梧山 李勇憲) 선생으로 이어졌다. 특히 오산 선생은 ‘조선 성리학의 6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6)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제자로서, 후학들에게 지대한 양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이계익 선생은 바로 오산 선생의 아들로서, 이계익은 아버지가 타계하자 부친의 학문을 잇기위해 ‘오산정’을 건립해 강학소로 활용했다.

옛말에 ‘효자 가정에서 효자 낳고, 충신 가정에서 충신을 낳는다’고 했던가. 300여년 전 흡취정에서 발원, 오산정으로 도도하게 흘러내린 역사의 시간은 변함없이 또 그렇게 후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정자에 보관된 ‘오산정 원운(梧山亭 原韻)’에서 이계익 선생의 당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지난 옛날 부모 생각 때가 없이 간절하여/ 동량(棟樑)나무 다스려서 이 정자를 세웠도다./ 아름다운 서석(瑞石)영기 구름 속에 묻혀있고/ 바라보인 망봉(望峰) 달빛 더딤없이 솟았도다./ 푸른 정자 그 유적이 한이 없이 아름답고/ 전해오는 바른 이모(貽謨) 이내 사정(私情) 깊었도다./ 척강(陟降)하는 그 영혼이 보일듯이 나타나니/ 신비하는 이 이치를 터득하기 어렵도다.

몇 번의 이건(移建)을 거쳐 현 위치에 놓여진 우산정은 도리 석초·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측면 2간의 아담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중앙의 거실 한 간을 제외한 좌우측면이 모두 툇마루로 연결돼 있고 사방의 주위가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있어 삭막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그 안에서 내뿜는 올곧은 정신의 뜨거운 열기는 이 곳을 찾는 길손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그림/한국화가 장복수 글

<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