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족사를 들춰보면 선대의 유업을 물러받아 그 맥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많은 가족들이 전혀 다른길을 걷기도 한다. 정치인의 집안은 더욱 그렇다. 정치에 입문해 가산을 탕진하고 토호에서 몰락한 가문으로 추락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선거에 출마해 낙선할 경우 경제적인 부담이 온 집안을 몰락의 길로 몰아가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치에 대한 매력이 후세들로 하여금 선대나 형제의 전철을 밟게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반세기 헌정사에 형과 아우가 아버지와 아들이 뒤를 이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것이 그 예이다.
가깝게는 지난해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 광주·전남지구당 위원장을 지낸 재선의원의 영광 조기상이 아버지 조영규의 뒤를 이어 11대와 12대에 국회에 입성했다. 조영규는 제헌과 3대에서 5대까지 내리 당선된 4선 의원이다.
형제 의원은 미군정때 대법원장을 지낸 무안의 김용무(2대)·용현(제헌)과 광양의 김선주(6대)·옥주(제헌)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동생이 먼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형이 나중에 금배지를 달았다. 또 형제들이 민족적 비극인 6·25전쟁을 거치면서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되는 가족사의 비운을 겪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둘째 문용 제헌때 먼저 출마
이들과는 달리 형제가 정치가 입문하지만 한명만 당선돼 절반의 성공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해남의 민씨형제들로 동생 영동이 제헌과 2대에 출마해 낙선하자 형 영남이 3대에 출마해 동생의 패배를 설욕하기도 했다.
역대 전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형제의원 배출로 보면 담양의 김씨 삼형제가 단연 돋보인다. 홍용과 문용·성용 삼형제의 선수는 5선을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형의 잔여임기를 동생이 채우기는 했지만….
이들 형제중 가장 먼저 정치에 문을 두드린 것은 둘째 문용이었다. 문용은 해방후 신성모 내무·국방장관의 비서관과 부관을 지냈다. 제헌의원에 출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며 2대때 맏형 홍용이 동생의 뒤를 이어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에는 형이 먼저 등원했다. 문용이 낙선한 제헌의원 선거에는 박영종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며 대독촉국회의 김동호와 조선민족청년단의 정균식 등과 겨뤄 정균식이 당선돼 50년에 치러진 2대때 형 홍용이 설욕에 나선 것이다.
2대 맏형 홍용 동생 패배 설욕
그러나 곧이어 터진 6·25로 홍용이 담양경찰서장과 함께 인민군에 의해 총살되자 보궐선거에서 문용이 형의 후광을 업고 당선돼 남은 임기를 승계했다. 2대에 당선된 문용은 3대때 박영종에게 패배하면서 정계를 떠났다. 박영종과 삼형제는 창평면 창평리 한 마을 출신이다.
막내인 성용은 형들의 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5대에 담양에서 출마하지만 낙선한 성용은 6대 민주당과 7대 신민당 등 야당의 전국구로 진출, 의원 집안의 맥을 이었다. 이후 9대때에는 유정회로 다시 의정단상에 오르면서 지역구 없이 3선의원을 지냈다.
7남매중 4명 의원 가족 배출
3남4녀인 김씨 형제는 결과적으로 남자 3명 모두가 국회의원 경력을 가졌으며 3대때 전북 익산의 강세형이 성용의 누나인 삼순과 결혼, 매형인점을 감안할때 7남매중 4명의 가정이 국회의원 집안을 이루는 보기드문 기록을 남겼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39년부터 50년 선거직전까지 창평면장을 지낸 맏형 홍용이 출마한 2대때 담양은 언론인 출신들이 대거 출마했다.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고재욱(민주당 손세일 의원의 장인), 동아일보 부사장 국태일, 호남신문 편집국장 박영종 등이 출사표를 던졌다. 선거결과 홍용은 이들 인사들을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러나 홍용이 전쟁 중 목숨을 잃자 52년 2월 보궐선거에 동생인 문용이 재도전해 당선됐다. 홍용은 6·25직후인 50년 7월18일 창평초등학교에서 열렸던 귀향 강연회에서 “이북의 공산도배들이 38선을 넘어 남침해 왔지만 미군의 참전으로 그들은 독안에 든 쥐꼴이 됐다. 곧 우리 국군이 북진해서 백두산 상공에 태극기 휘날릴 날이 머지 않았다”고 연설했다. 그러나 이 발언이 빌미가 되어 그해 8월15일 광복절날 창평지서에서 1㎞떨어진 구시장터 인근의 상등성이에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한다.
보선서 문용 당선 임기 승계
형이 타계한 뒤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문용은 일제때 동경제대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제일고와 해방후 서울대 정치과를 졸업한 육군 중령 출신이다. 그는 2대에 이어 3대때 재선에 도전하지만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박영종에게 패배했다. 영종은 차점자인 김동호와 약 1만여표 차이로 당선됐다. 박영종은 등원하자 곧바로 자유당을 탈당, 민주당에 입당하고 뒤이어 낭산 김준연의 통일당 창당에 관여했다. 그는 최대의 달변가로 꼽힌다. 그가 3대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한 횟수는 모두 450회로 2위인 영광의 조영규의 251회를 훨씬 웃돌았다.
형들의 뒤를 이어 5대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부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막내 성용이 국회의 문을 두드리지만 실패했다. 결국 김씨 삼형제들은 48년 제헌의원에서부터 60년 실시된 5대 선거까지 12년간 4대를 제외하고 통산 다섯번 출마했다. 2대 선거는 맏형의 죽음으로 문용이 출마해 한대에 두번 출마한 셈이 됐다.
성용이 낙선한 담양의 5대 선거에는 한청군단장을 지낸 무소속의 조규태와 고재필,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국순엽과 민주당의 김동호 등이 출마했다. 선거결과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김동호가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민주당의 바람을 타고 고재필을 310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으며 성용은 3위에 그쳤다. 2위에 머문 고재필은 이후 4선의원을 지내며 3공화국때 보사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육군준장으로 예편한 고재필은 5공화국에서는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개각때만 되면 호남출신으로 국무총리설이 나돌기도 했다.
막내 성용 5대 출마해 낙선
선거에서 낙선한 성용은 5대 선거가 지역구에서 출마한 마지막 선거가 됐다. 이후 그는 전국구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또 민주당과 신민당, 유정회 등으로 세번 모두 소속 정당을 달리했다.
한국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국회의원 삼형제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문용과 성용보다 누나인 사순이 이총재의 어머니이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옛 창평초등학교 교사로 있다 이총재의 아버지로 검사출신인 홍규와 결혼했다.
또 아버지 재희는 창평면의 천석꾼으로 24년부터 29년까지 면장을 지냈다. 6·25때 좌익들이 집에 불을 질렀는데 타는 데만 사흘이 걸렸으며 잿더미에서 나온 문고리만 한가마가 됐다는 얘기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둘째딸 사순씨 이회창 어머니
맏형 홍용의 장남 승욱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으며 경성여자사범을 나온 안전희와 결혼했는데 안씨는 중동학교를 설립한 안일영의 조카딸로 사돈간을 맺었다.
현재 이들에 대한 기록을 고향인 창평면에서 수집중에 있다. 삼형제가 의원에 당선된 집안이지만 현재까지 담양과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형제는 홍용의 동생인 삼순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로 유명한 삼순은 3대때 국회의 재경위원장을 지낸 강세형과 결혼했으나 합의 이혼했다. 삼순은 금성면 원율리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나 고령으로 자주 내려오지는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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