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면이 태자하와 산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

유리왕, 양맥족 정복 후 쌓은 고구려 사람들의 보금자리
현지인들 “기름진 땅에다 큰 자연재해 없는 축복의 고장”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연나라 태자 丹 슬픈 전설 전해져
<고구려 내륙 근거지 태자성①>

▲ 북문 북측에서 본 성안의 모습.
장백산맥과 나란히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나온 용강산맥(龍崗山脈) 남부지역의 무순시(撫順市)에 속하는 신빈현(新賓縣) 평정산진(平頂山鎭) 홍석립자(紅石砬子)산에서 발원해 서남쪽으로 본계(本溪)의 관음각저수지에 유입한 다음, 본계시와 요양(遼陽)시를 거쳐 해성(海城) 서쪽에서 혼하(渾河)강과 합류해 영구(營口)의 대요하(大遼河·발해로 유입되는 요하강의 두 물줄기 중 하나)로 흘러드는 큰 강이 하나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연수(衍水), 그 후에 대량수(大梁水)로 불리던 이 강은 요나라와 금나라 때부터 태자하(太子河)라 고쳐 불렀다(요·금 시기도 대량수란 이름을 겸용).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 대자하(代子河)나 태자하(太資河)라 부르던 이 강은 청나라 때에는 만족어로 타스하(塔思哈)나 우르후비라(烏勒乎必喇)로 불렀다. 우르후는 갈대라는 뜻이고, 비라는 강이란 뜻인데 그때는 강에 갈대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러 가지 호칭을 지니었던 이 강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태자하의 이름으로 고착돼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오고 있다.
이 태자하의 발원지와 가까운 신빈현 하협하향(下夾河鄕)의 태자하 남안에 삼면으로 강물이 감돌아 흐르고 또 삼면으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2천년이 넘는 옛 성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중국에서 태자성(太子城)이라 일컫는 고구려의 옛 성이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은 고구려가 혼강(渾江) 유역에 나라를 세운 뒤 제일 먼저(유리왕 때) 삼켜버린 양맥(梁貊· 옛날 양수<梁水>, 즉 태자하 상류지역의 오랑캐<貊>라는 뜻) 부족(部族)의 왕성(王城) 중 하나이다. 고구려가 이곳에다 성을 새로 쌓고 양성(梁城)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즉 ‘호태왕(好太王)’ 비석에 조각되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이 성을 또 맥성(貊城)이나 양맥성(梁貊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은 고구려역사와 관련되는 사서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산성으로서 고구려시기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요동복지(腹地) 고구려 사람들의 근거지와 보금자리이다.

흰 눈이 천지를 뒤덮은 12월의 한 차가운 날에 필자는 태자성을 답사하였다. 이날, 심양(沈陽)에서 매하구(梅河口)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신빈현 남잡목(南雜木)에 이르러 거기서 관전(寬甸)으로 가는 성도(省道)를 따라 남쪽으로 약 65㎞ 달리니 목적지 태자성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태자성 남측 가파른 산등성이 아래에 오붓하게 자리잡고 있는 태자성 마을에 들렀다. 지금 1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태자성과 함께 북·동·서 3면으로 큰 산에 둘러싸여 바람을 등지고 양지바른 국지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 태자성 문화재 비석.
태자성과 이 마을의 환경을 인터뷰하자 이곳 사람들은 자랑이 늘어졌다. “태자성 이곳은 땅도 기름지고 농사도 잘 되지요. 봄부터 얼음이 얼 때까지 서리가 내리는 것도 보기 드물어 어떤 작물이든 심기만 하면 다 풍작을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 이 곳 사방으로 40리 안쪽에는 종래로 무슨 큰 자연재해가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참으로 복을 탄 고장입니다. 아마 태자성 덕분인가 봐요.” 정말로 놀랍고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더 사람을 놀랄 만한 것은 이 옛 성의 연역(演繹)과 그 옆에서 흐르고 있는 태자하의 전설이다. 그럼 우리들은 역사와 전설 속으로 들어가 요동의 깊은 산속 태자하 기슭에서 생긴 사람들로 하여금 2천년이 넘어도 아직까지 아쉬워서 손목을 불끈 쥐고 탄식을 하게 하는 비장(悲壯)한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기원전 226년, 한 갈래 방대한 대열이 연나라(燕國) 도읍 계성에서 황급하게 출발해 요동으로 달려온다. 이것은 도망가는 대열로서 이를 이끄는 자는 연나라 43대 국왕이자 바야흐로 연나라 마지막 황제가 될 희(喜)와 그의 아들 태자 단(丹)이다. 이에 앞서 진(秦)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荊苛)를 보내어 진시황을 자사(刺死)하게 했다. 하지만 하늘은 연나라를 돕지 않았다. 도궁비수견(圖窮匕首見·그림을 다 펴자 비수가 나타났다는 뜻)하는 역사사건이 생겨 형가는 살해당하고 만다. 크게 노한 진시황은 대장 왕전을 파견,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진나라군은 승승장구로 연나라 도읍까지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태자 단은 부랴부랴 2만명의 정예군을 데리고 국왕 희를 호위하며 요동으로 도망 오게 된 것이다.

태자 단 등이 도망간 소식을 알게 된 진시황은 분해서 대장 이신(李信)을 파견해 신속히 요동으로 추격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하나는 앞에서 도망가고 다른 하나는 그 뒤를 쫓아가는 두 대열의 인마(人馬)들이 요동 땅에서 새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달린다….

▲ 산성 남벽 아래에 있는 태자성 마을.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의 대열이 먼저 요동군 소재지 양평성(현재 요양)에 이르게 되었다. 태자 단은 자리를 잡아 국왕을 배치해 놓고 몸소 측근들을 데리고 양평성의 주변 환경과 방어시설을 살펴보았다. 요동의 큰 산들이 동쪽에 있는 양평성은 동쪽과 북쪽에는 큰 강 연수(衍水, 즉 태자하)가 흐르고 있어 괜찮지만 서쪽에는 확 트인 일망무제한 평야라서 의지해 지킬 수 있는 험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서쪽에서 뒤쫓아 오는 적군이 쳐들어오면 홍수처럼 밀려들 수 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제나라 땅을 되찾는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연나라는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참 뒤를 쫓기고 있는 연나라 왕실로서 양평성에 정착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반드시 다른 지역에 가서 출로를 찾아야 했다. 바로 이때 태자 단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이신의 군이 요하강을 이미 건너 양평 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연나라 왕 희는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태자 단은 과감하게 양평성을 포기하기로 하고 왕실과 군사들과 함께 연수를 거슬러 요동산간지역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편, 이신이 이끄는 진나라군은 쉴 사이 없이 달려 양평성까지 추격해 왔다. 그러나 태자 단 부자(父子)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고 남아있는 것은 빈 성 뿐이었다. 이신의 대군은 산봉우리들이 기복을 이루며 끝없이 이어진 요동의 산맥을 바라보며 막연해 탄식만 할 뿐 어쩔 수가 없었다….

▲ 산성 남벽터에서 본 태자성 서쪽 봉화대.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은 군사들과 함께 죽을 힘을 다해 요동의 깊은 산속으로 도망 왔는데 연수 발원지역에 이르러 한 높은 산마루가 길을 가로 막았다.(그곳이 바로 지금 태자성 근처라 전한다) 기진맥진한 인마(人馬)들은 잠시 멈추어서 쉬어가기로 했다. 태자 단은 대열을 끌고 양평성을 떠나 요동산지로 와 호랑이와 늑대 떼 같은 진나라군을 당분간 따돌리기는 했지만 부왕(父王)을 어디에 정착시켜야 할지 몰라서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대열이 휴식을 취하게 되자 그는 임시 머물고 있는 고장의 산천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가 머리를 들어 앞을 가로막은 산을 바라보니 그렇게 찾고 싶었던 고장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는가! 넓은 산등성마루에는 몇 만 명의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고, 산등성이 동쪽과 북쪽 측면은 아찔한 낭떠러지고 남쪽 측면은 가파른 산비 탈인데다가 삼면으로 산과 강물로 둘러싸여 난공이수의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등성이 주변에는 연수와 그 지류의 충적평원이라서 농사를 짓는다면 군량미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옳다! 이곳이 바로 우리들의 가장 좋은 정착지구나!” 태자 단의 찌푸렸던 양 미간이 삽시간에 펼쳐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연나라 왕실과 군사들은 이 고장에 정착해 산등성 위에 성곽을 쌓고 하곡지대에는 논과 밭을 일구어 농사도 지으며 군사들을 훈련시켜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려고 했다. 고요하던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가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한편, 연나라왕 부자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노발대발해 양평에 머물러 있는 이신에게 계속 그들을 추적하도록 명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연나라 왕 희는 또 당황해 했다. 이때, 대군(代郡)에 도망가 임금을 자처하고 있던 조나라 공자(公子) 가(嘉)는 연나라 왕 희에게 편지를 보내 “진시황이 연나라를 소멸하려 한 것은 태자 단을 미워해서 그러는 겁니다. 만약 폐하께서 태자 단의 수급을 보낸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입니다”라고 권고했다. 연나라 왕 희는 고민 끝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진 마음을 먹었다. 그는 태자 단을 불러다 술을 먹여 만취하게 한 다음 손을 썼다. 그리고 나서 아들의 수급을 이신의 군에 보냈다. 아들을 죽이고 대성통곡하는 연나라 왕 희는 너무도 슬퍼서 살 의욕을 잃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산성의 군사들과 주변에 백성들은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마침 초여름인 5월인데 하늘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져 평지에 2척 5치의 두께로 쌓이고 기온이 떨어져 겨울처럼 추웠다고 전한다. 아마 하늘과 땅도 감응이 있는가 보다. 아들의 죽음으로 연나라 왕 희는 한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군이 쳐들어와 연나라 왕 희는 포로가 되고 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 성 안에 남아있는 장대 터.
후세에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죽게 된 태자 단을 기리기 위해 연수를 태자하로 고쳐 부르고 태자 단이 연수 발원지역에 쌓은 그 산성을 태자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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