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우물·석축…2천년전 고구려인 생활상 고스란히…
철촉·말등자·쇠고리·쇠못·쇠가마조각·도자기 등 유물 출토
험한 산세·천태만상 기암괴석 어우러져 빼어난 장관 연출
유리왕 두 왕비 ‘화희·치희’의 애달픈 전설 전해지기도

소성자산성에서는 일찍이 철촉, 말등자, 쇠고리, 쇠못, 쇠가마조각 등 철기를 망라해 도자기 등 많은 문물(文物)이 출토됐다. 이 산성에는 현도궁 등 후기에 축조된 유적 외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고구려시기의 성벽과 병마의 수원(水源)으로 사용되었던 샘터, 천지, 우물, 연자돌 등 생활용구들이 2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겪어온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 남쪽으로는 많이 파괴되었지만 산사태에 대비해 쌓아놓은 방수벽과 산사태를 빼돌릴 수 있는 배수문 등 시설도 애초의 윤곽을 대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산성 안에는 길이가 100여m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동서로 나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샘물이 벼랑을 타고 졸졸 흘러내리고 있어 산성 내의 수원을 보태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험한 산세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과 서로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벼랑 밑 샘물터에서 물을 받아 마셔보았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필자를 동행한 강경생씨는 이 물을 많이 마셔봤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할 뿐만 아니라 배탈이 난 적이 없다고 했다.

산성 중앙 동남편 약간 펑퍼짐하게 꺼져 들어간 곳에 옛 우물이 보였다. 푸른 이끼가 덮인 우물의 돌들이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1m 남짓한 깊이까지 물이 차 있었다. 강씨의 말로는 이 우물이 산 위에 있지만 지금까지 마른 적이 없고 넘친 적도 없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현지 사람들이 ‘용액신수(龍液神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의 물을 마시면 몸이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다고 한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한 모금 마셔보았다. 햇빛이 비쳐서인지 우물물이 시뿌옇게 보였는데 생각보다 방금 전 벼랑 밑 샘물맛과 별반 다르지 않게 차고 달았다.

이 우물에서 동북쪽으로 3m가량 사이에 두고 네모난 돌로 쌓아 두른 너비 약 5m, 길이 10m 되는 못이 있다. ‘천지(天池)’라고도 부르는 이 못은 당시 병영의 생활용수로 사용되었음직했다. 그러나 강씨의 소개에 따르면 이 못이 옛날에는 포로나 죄인을 가두었던 물감옥으로, 유리왕의 후궁인 화희가 갇혔던 곳이라고 한다. 매년 장마철이면 이 못의 물이 넘쳐나 작은 폭포를 형성하면서 멋진 경치를 연출한단다.

산성 서쪽에는 돌로 쌓은 2기의 석묘가 있다. ‘2희묘’라고 하는 이 2기 석묘 근처에 석축건물터가 하나 있다. ‘2희묘’에는 유리왕의 두 왕비가 묻혀 있고, 그 근처 석축 건물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 무신왕이 태자 때 이곳에서 묘지기를 하면서 효를 행했다고 전한다. 물감옥(천지)과 ‘2희묘’ 및 그 근처 석축건물에 애달픈 전설이 얽혀있다.

그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 초대 왕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등극한 후 왕비 송씨가 병환으로 죽자 유리왕은 선후로 두 계실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녀들 이 바로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다. 화희는 부여(골천)사람이며 치희는 한인(漢人)이었다. 유리왕이 화희 후에 들여놓은 치희를 총애한 탓으로 치희는 화희의 질투를 심하게 받았다. 이리하여 유리왕은 그녀들에게 각각 궁을 지어주어 따로 지내도록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유리왕이 기산(箕山) 순방길에 나서며 7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화희와 치희는 그 7일 동안 질투의 싸움을 벌였다. 화희는 한인의 비천한 계집으로서 앞으로 아이가 생겨도 태자로 세울 수 없거늘 왜 그렇게 까부는가 하며 치희를 심하게 모욕했다. 치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신하들의 비웃음 속에서 화희를 어쩔 수가 없어 홧김에 그만 시종을 데리고 요동의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유리왕이 돌아와 치희가 한을 품고 돌아갔다는 말을 듣자 즉시 말을 타고 그녀를 뒤쫓아가 갖은 방법으로 달랬다. 하지만 치희는 화가 풀리지 않아 궁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제 속을 참지 못해 그만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려버렸다. 유리왕은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후회막급한 일이었다. 그는 치희를 그리며 그녀를 소성자산성 안에 고이 묻어주었다. 이와 함께 그 성안에 물감옥을 만들고 치희의 무덤 앞에서 속죄하라며 화희를 그곳에 가뒀다. 그리고는 송씨의 아들 무신왕(이때 왕좌에 오르지 않음)을 시켜 화희를 지키게 했다. 후에 화희가 물감옥에서 죽자 역시 성안에 묻히게 되었다. 무신왕은 그 후 ‘2희묘’ 옆에 건물을 짓고 무덤지기를 하면서 효도를 다해 대신들의 신임과 찬송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벼랑 동쪽으로 갔을 때 무슨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강경생씨에게 물으니 자신도 모른다며, 이 산에는 수십 종류의 이름 모를 새들과 여우, 산토끼, 청솔모 같은 작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멧돼지와 곰 같은 짐승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강씨는 송백나무와 가래나무, 참나무 등 갖가지 나무가 자라는 이 산에는 밤나무가 가장 많은데 수령이 수백 년 된 청나라 시기의 밤나무만 300여 그루가 된다고 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지름이 1m 이상 되어 보이는 늙은 밤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띄었다. 300년이 넘었다는 이 밤나무마다 관광객들이 소망을 담아 매어놓은 붉은 비단띠가 잔뜩 매달려 있었다.

소성자산성은 산세가 기이하고 경치가 아름답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니 또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성 앞으로 U자형을 그리며 휘감아 흐르는 소아하와 그 기슭을 따라 나있는 관전현에서 청산구풍경구에 이르는 포장도로 자체가 멋진 자연풍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 소성자산성에서 벌어진 싸움과 기타 역사사실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설인귀가 이 산성을 불태웠다는 전설만 현지에서 떠돌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설인귀가 요동정벌에서 71개 고구려산성을 연속 탈취한 후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소성자산성 앞에 이르렀다. 설인귀가 기암괴석이 널려있는 깊고 험한 산속의 구름안개가 감돌고 있는 높은 산정에 쌓여있는 성벽을 둘러보니 험준한 벼랑이 마치 도끼로 내려찍은 듯 아찔했고 오직 남문만이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소로가 암석 사이로 나 있었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관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통과해야만 산정에 이를 수 있다.

설인귀는 산성의 험준함에 놀랐다. 그는 군사들에게 명해 산성을 겹겹이 에워싸게 하고 포석차로 산성에 돌을 날리게 했다. 며칠 동안을 이렇게 공격했지만 산성을 지키는 고구려군은 털끝만큼의 손실도 없었다. 성을 지키는 장수는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10여 명의 군사를 남문에 보내어 윤번으로 지키게 하고는 들어앉아서 술만 마셨다. 쳐들어온 당나라 군사들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급한 건 설인귀였다. 포석차로 돌을 날렸으나 구름 위에 솟은 산성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산성에는 양식과 마초가 충족했다. 당나라군이 아무리 포위하고 있어도 성안에는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어 걱정이 없었다. 한 달여를 공격했지만 허사였다. 설인귀는 고민에 빠졌다. 때는 늦가을이어서 계속 이대로 나가다가는 북방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없어 휘하의 군사들은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돌아가 고종황제를 뵙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설인귀는 연거푸 며칠 동안 밥맛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웬 신선이 부르기에 장막을 나가보니 신선이 그를 데리고 산세를 돌아보며 산성을 깨뜨릴 계책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설인귀가 깨어보니 꿈인지라 신선이 가르쳐준 대로 군사들에게 명해 밤도와 불화살을 만들게 하고 사흘 후에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사흗날이 되자 당나라군은 설인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산성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이때 신선은 머리에서 금비녀를 뽑아 신전(神箭)으로 변하게 한 후 설인귀에게 넘겨주었다. 설인귀는 신력을 빌려 산성을 향해 신전을 날렸다. 산성 안에서는 삽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산성 안의 병영과 양초들이 세찬 불길에 잿더미로 되자 연개소문과 그의 군사들은 할 수 없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전설은 신화의 성격이 있기는 하나 고구려가 멸망할 무렵의 사실에서 유래된 것 같다. 공교로운 것은 지금도 산성과 약 1㎞ 떨어진 맞은편 산에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서 있고, 그 옆에 네모난 너럭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사람 같은 바위는 바로 그 당시 설인귀에게 성을 깨칠 계책을 알려준 신선의 화신이라 하고, 그 옆의 너럭바위는 설인귀가 신전을 쏴서 날린 자리라고 한다.
최근 몇 년간 여전히 관광지로 개발 중인 소성자산성은 이름이 점차 퍼져 적지 않은 국내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 조선문보기자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