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숨겨진 역사찾기한인 미국 초기 이민자들의 항일 독립운동과 나라사랑 일본의 조선침략과 동학혁명(2)

동학군 섬멸 청·러 전쟁 승리 후 침략 노골화 
반외세·자주 동학운동 실패는 한국역사의 비극
일부 동학군 체포피해 밀항선 타고 하와이로

 

 

조선은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각종 조약을 맺었고 부산, 원산, 인천 등 주요 항구도 개방했다. 항구개방과 함께 서구 열강의 각종 생활용품들이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조선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 아래 일본의 경제침탈은 치밀하게 진행됐다.

서구의 기계문명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의 자본주의는 1800년대 후반에 급속히 성장했다. 몰락한 무사계급은 값싼 노동자로 전락했다. 일본은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가 급성장했다. 그러나 섬유와 군수산업에 대한 무모한 투자확장과 흉작은 경제공황을 몰고 왔다. 일본은 그 타개책으로 해외시장 침략을 서두르게 된다.

일본은 1880년 이후 계속된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 심각한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부족한 쌀을 충당했다.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식량을 가져갔다. 이 탓에 조선에서는 쌀값이 뛰고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보다 못한 지방관들은 조정의 지시를 무시하고 곡물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했다.

1876~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의 방곡령 사건은 조정의 개입으로 원만히 해결됐다. 그러나 3건의 방곡령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마찰로 비화됐다. 1889년 5월과 10월, 황해도관찰사 조병철과 함경도관찰사 조병식이 각각 쌀과 콩 수출을 금지했다. 또 1890년 2월 황해도관찰사 오준영이 일본 상인들이 구입한 곡물을 황해도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1903년 제물포 모습. 조선인 이민자들은 제물포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7,200명 정도가 이민을 갔다. 이중에는 일본군의 체포를 피해 밀항한 동학군들도 있었다.
일본은 2년 뒤, 3건의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조선에 요구했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경제 침탈은 더욱 극심해졌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장사치들의 농간도 감수해야 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만주로 도망을 갔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에 따른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학정은 조선을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었다.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은 갈수록 노골화됐지만 조정은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결국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염원케 하는 원인이 됐고 때마침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급속도로 그 세를 키웠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와중에 일본군 교관 등이 살해되자 일제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병권(兵權)을 장악했다. 1884년에는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3일천하로 끝나 오히려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1894년 2월 10일 전북 고부에서 동학군들이 농민들과 함께 봉기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 때문이었다. 수탈과 학정으로 궁지에 몰려 살길이 없던 농민들은 동학군의 봉기에 적극 참여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처지였기 때문이다. 전봉준을 위시로 한 동학군들은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북으로 진격, 마침내 5월 31일 전주를 점령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진압하기 어렵게 되자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하자 일제도 즉각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청군은 아산만 일대에,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해 서울에 주둔했다. 동학군의 봉기를 핑계 삼아 일본과 청국군대가 들어오자 동학군은 일단 해산하고 추이를 관망키로 했다.

조선 지배를 놓고 청나라와 다투던 일제는 드디어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충청도와 평양 등지에서 청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청을 몰아낸 일본은 조선강점을 앞당기기 위해 일본반대파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학농민군은 일제를 축출(斥倭)하기 위해 다시 봉기했다.

일본군에 체포된 동학농민군 전봉준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관군의 우세한 화력과 전술에 밀려 처절히 패배 당한다.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무너지자 김개남의 동학농민군과 손병희의 북접 주력부대가 북상을 시도하나 그들 역시 무참히 쓰러진다. 비슷한 무렵 강원도와 황해도, 평안도에서도 동학군들이 봉기하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에 의해 모두 와해됐다.

우금치 전투와 청주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들은 장흥 이방언 대접주의 지휘를 받은 전남지역 동학군에 합류해 후일을 도모했다. 동학군들은 1895년 1월 장흥과 강진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나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전라도 일대 동학운동에 참여한 농민들과 가족들을 샅샅이 찾아내 무자비한 처형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전남 장흥에 집결해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이방언 대접주가 지휘했던 장흥전투 상상도 /그림 조연희 화백

이 과정에서 일부 동학군들이 서남해안 일대 섬에 숨어 있다가 일본이나 중국으로 밀항, 최종적으로는 하와이와 미국본토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학운동 직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지는 않았지만 1902년부터 시작된 미국이민행렬에는 동학군 출신들이 끼어있었다. 해외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문양목씨와 백일규씨가 동학군이었다. 다음 편에 소개할 미국거주 박영보씨의 할아버지 두 분도 체포를 피해 하와이로 도망 온 동학군이었다.

한편 동학군을 진압한 일제는 거침이 없었다.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일본의 조선강점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외국세력은 거의 제거를 한 것이다. 일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조선 식민지화에 대한 열강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해 조선식민지화의 걸림돌을 모두 제거했다.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늑결(勒結)했다. 또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트집삼아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 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의 제1조는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 한다’는 것이었다. 27대 519년 만에 조선왕조가 망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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