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고향 뒤로 하고 미지의 하와이로…한인 미국 초기 이민자들의 항일 독립운동과 나라사랑3)조선인의 하와이 이민과 동학군(上)

하와이 농장주들 인력난 해결위해 조선인에 눈독
존스목사 설득으로 인천 내리교회 신자 대거 이민
1902년부터 3년간 7천여 명 사탕수수 농장으로
대부분 하층민, 구식군인과 동학농민도 끼어있어

▲ 한인 이민자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취재하기 위해 최혁 주필이 방문한 미국 5개주. 록키산맥 일대의 도시와 하와이에는 한인들의 혼과 애국심이 곳곳에 배어있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이민노동자

1778년 쿡선장이 하와이를 발견했다. 이후 미국 선교사와 포경업자, 커피재배업자, 설탕업자들이 하와이로 몰려들었다. 설탕소비의 증가로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급증했다. 1835년에는 커피를 제치고 하와이에서 가장 많이 심는 작물로 등장했다. 당연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됐다.

사탕수수 농장주들로 구성된 하와이농업협회(Royal Hawaiian Agricultural society )는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1852년 광동(廣東:Canton)지역에서 중국인 노동자 293명을 데려왔다. 이후 중국인 노동자들이 물밀 듯 몰려들어왔다. 1897년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수가 무려 4만6천여 명에 달했다.

중국 노동자들은 좋은 평판을 받았다. 고분고분했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3년 6개월 동안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농장을 떠나 도시로 진출해 가게를 열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을 다시 수입했다. 이에 따라 18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수가 중국인 노동자들 수보다 많아졌다.

▲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 여인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다. 조선 여인들은 타고난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생활력으로 어려운 이민 생활을 잘 이겨냈다. 또 자녀교육에 열성을 다해 2세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1894년의 경우 하와이에는 1만3천명의 일본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는 전체 노동자 수의 5분의 3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은 수시로 집단 태업(怠業)을 벌였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골치를 아프게 하자 하와이 농장주들은 또 다른 해외노동인력을 물색했는데 마침내 찾아낸 것이 조선인들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주한미국공사(駐韓美國公使) 알렌을 접촉했다. 1901년 조선에서 귀국해 오하이오 주에 머물던 알렌은 1903년 2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사탕수수 사업에 간여하고 있던 어윈(William G. Irwin)을 만나게 된다. 어윈은 조선에서 농장 일꾼들을 구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했다.

알렌은 고종(高宗)을 설득해 백성들의 해외이민을 승낙토록 했다. 1902년 가을, 조선 정부로부터 이민허가가 떨어지자 알렌은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avid W. Deshler)를 이민 알선자로 주선했다. 데쉴러는 알렌공사에게 부탁해 조선 조정이 해외이민업무를 전담할 기구를 설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02년 8월 20일 수민원(綏民院)이 설치됐다. 고종은 민영환(閔泳煥)을 총재에, 서병호를 사무국장에 임명했다. 수민원은 서울과 부산(釜山), 인천(仁川), 원산(元山)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같은 이민 희망자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조선인들은 부모·형제와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떠나는 것을 죄악시했다.

▲ 이민선 겔릭호. 1903년 86명의 조선인 이민자들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상륙했다. 최초의 이민자들이 타고온 미국상선 겔릭호.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간 최초이민행렬

이민희망자들이 거의 없자 데쉴러는 알렌을 통해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한국명, 조원시: George. Heber Jones)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존스목사는 하와이에서는 더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해질 것이라고 신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교인 50명이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섰다.

이외에도 인천 항구 부두노동자 20여명과 배를 타는데 익숙한 강화도와 교동사람들도 이민대열에 합류했다. 마침내 1902년 12월 22일 모두 121명으로 구성된 조선인 최초의 이민단이 일본 화물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일본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101명이 나가사키(長崎)에서 미국 상선 S.S.겔릭(Gaelic)를 갈아 탔다. 이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게 된다.

상륙직전, 선상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눈병을 앓고 있던 15명은 상륙허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86명의 조선인(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아이 22명)들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상륙했다. 이후 1905년까지 3년 동안 7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대부분 도시출신이었다. 농촌 출신은 모두 1천여 명에 불과했다.

▲ 첫 이민선에 승선한 인천 내리교회 신자들. 1902년 겨울 제물포를 출발한 첫 이민선에는 내리교회 신자 50명이 승선했다.

 

지식인들도 여러 명 포함돼 있었으나 대부분 항구 도시의 노동자나 하층계급 출신들이었다. 6천명 이상이 20-30대의 젊은 남성들이었으며 대다수가 미혼이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 중에 구한말 출신 군인이 300여명에 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기이민자들의 성격은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신자, 생계가 막막했던 하층민 부랑자, 구한말 출신, 하와이에서의 삶을 동경했던 식자층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인 초기이민자들 중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체포를 피해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건너간 동학군들도 끼어있었다.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박영보씨의 할아버지 두 분, 박기홍(朴基鴻)씨와 박기덕(朴基悳)씨가 하와이로 도망 온 동학군이었다. 그들의 조선탈출기와 하와이 이주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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