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초기이민자 중 일부는 동학출신한인 미국 초기 이민자들의항일 독립운동과 나라사랑조선인의 하와이 이민과 동학군(下)

소년병학교 설립 등 항일무장투쟁 앞장서
문양목·백일규 선생 등 조선독립위해 활약
박기덕·기홍 형제도 일본군 체포피해 밀항

 

동학출신 문양목, 백일규 선생
 

문양목 선생 백일규 선생

하와이 초기이민자와 관련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그 중 일부가 동학농민운동 참가자들이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문양목(文讓穆), 백일규(白一圭) 선생이다. 이들은 해외독립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주 땅에 살던 한인노동자들을 규합해 상부상조토록 했고, 적극적으로 조선독립을 위한 군사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상해임시정부 지원에도 기여한바 크다.

문양목 선생은 충남 태안군 남면 출신이다. 남평(南平)문씨로 문익점(文益漸)의 18세손이다. 한학에 출중했던 선생은 향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26세의 나이에 동학전투에 나섰다. 당시 서산 일대 동학조직에는 남평 문씨 일가가 다수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서산 일대 동학군은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참패를 당했다. 선생은 포로로 잡혔다. 관군에 끌려가던 선생은 아는 이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 인천으로 도망갔다. 기회를 엿보다 1905년 하와이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이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결성하고 기관지인‘대동공보(大同公報)’발행해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백일규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6세 어린 나이로 동학의 지도자인 접주로 동학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며 농사를 짓다가 26세 되던 해인 1905년 하와이이민선을 탔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겸 대동공보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네브라스카주로 이주해 박용만 선생과 함께 소년병학교 교사로 일했다. 1918년 캘리포니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선생은 1912년 한국경제사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헌국경제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선생은 신한민보, 국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이처럼 동학농민군 출신들이 포함돼 있었기에 미주한인들의 항일투쟁은 무장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일본군과 싸웠던 전투경험이 있었기에 일본군을 상대하려면 군사력을 키우는 한편 둔병제(屯兵制 형식을 통해 한인농부들이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들은 박용만선생의 한인소년병 학교 설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편으로 기자는 문양목, 백일규 선생 외에도 초기이민자들 중 일부에는 동학농민군이 포함돼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1895년 1월 동학군이 장흥전투에서 궤멸당한 후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으며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동학도들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일제의 마수가 뻗치지 않는 하와이로 도주할 가능성이 그만큼 컸다.
 

 

민병용 관장(가운데)과 기홍씨의 손자 박용보(맨 왼쪽)씨가 동학군들의 초창기 이민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일본군 체포피해 하와이로 밀항한 박기홍·기덕 형제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자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입증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지난 5월 29일 미국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리스(L.A)에 도착했다. 다음날 민병용(閔丙用) 한인역사박물관 관장을 만났다. 그런데 민 관장을 만난 날, 그는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어떤 이의 전화를 받았는데 자신이 일본군의 체포를 피해 하와이로 건너온 동학군의 후손이라 하더라는 것이다. 민 관장께 부탁해 서둘러 그 분과 약속을 잡았다.

다음 날, 민관장과 함께 동학군의 후손이라는 박영보(朴永保)씨를 만났다. 박씨는 인사를 마친 뒤, 몇 장의 사진과 자료를 펼쳐놓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큰 줄거리는 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이 동학농민군 출신으로 일제의 체포를 피해 황급히 하와이로 건너갔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두 할아버지가 도피 중에 충남 예산에서 어떤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 선교사가 집에 데려가 숨겨주었다고 말했다. 선교사가 주선해 일본 화물선을 타고 하와이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두 할아버지가 하와이로 간 때는 1895년을 전후로 한 시기다. 최소한 공식이민이 시작된 1902년보다 앞섰을 가능성이 크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박씨의 큰 할아버지 기홍씨는 나중에 감리교 목사가 됐다고 한다수 십 년 일기를 써왔는데 1956년 세상을 떠날 때 임종했던 병원에서 그의 유품을 허술하게 처리해 모두 잃어버렸다. 영보씨의 할아버지 기덕씨는 선교사가 돼 한국에 들어와 결혼하고 아들, 딸을 낳았다. 그 중 한명이 판사가 된 학진씨인데 학진씨 아들이 영보씨다.

영보씨는 1943년 충남 보령 남포에서 태어났다.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와 테네시 주를 거쳐 지금은 L.A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아카디아(Arcadia)시에서 살고 있다. 영보씨는 큰 할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몹시도 아쉬워하고 있다. 어쩌면 한인들의 미국이민사 일부를 바꿔 써야할지도 모르는 귀중한 자료들인데 그리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의 체포를 피해 하와이로 밀항한 박기홍씨. 첫 번째 한국인 아내를 잃고 하와이 원주민 여인과 재혼했다. 1956년 사망 당시 병원 측의 실수로 수십 년 동안 쓴 일기와 각종 자료가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그가 내민 사진 중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큰 할아버지 기홍씨가 첫 번째 한국인 아내를 병으로 잃고 두 번째 아내로 얻은 하와이 여인,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자료들은 기홍씨가 했던 말을 후손들이 적어둔 것이다. 자서전 형식으로 써진 이 기록물을 살펴보니 여러 가지 정황상 기홍·기덕씨 형제가 하와이로 건너온 것은 1902년 이전이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자료와 미국 입국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움만 크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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