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미국 초기 이민자들의항일 독립운동과 나라사랑5.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조선인들

사탕수수 거친 잎 때문에 두꺼운 옷 입고 폭염 속 중노동
짐승 취급 받으면서도 독립자금 보내고 열심히 자녀교육
최초 이민자 86명중 호남인은 3명, 통역은 17세 목포출신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이들은 하루 10시간 씩 일을 하면서도 힘을 모아 조국광복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자녀교육을 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민병용관장 제공
하와이 호놀룰루 항을 거쳐 입국한 조선인 이민자 86명은 오아후(Oahu)섬 서북쪽에 있는 모쿠레이아(Mokuleia)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했다. 이중에는 광주출신 조정태(45세)와 전주출신 문부근(22세)이 포함돼 있었다. 눈에 띠는 것은 이들을 인천항에서 하와이 농장까지 데리고 간 통역이 목포출신 정인수라는 점이다. 

정씨는 데쉴러가 이민업무를 위해 설립한 동서개발회사의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에 불과한 나이지만 영어를 알아 통역신분으로 미국을 오갔다.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자세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한인노동자들은 모쿠레이아 농장에서 일하다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다른 농장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와이파우(Waipahu)와 에와(Ewa), 와이아네(Waianae) 농장에 비교적 많은 한인들이 모여서 일을 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일했던 카후쿠 사탕수수 농장. 지금은 소규모 설탕공장으로 변했다. 박용만 선생은 카할루에 있던 국민군단을 1915년 카후쿠 농장 인근으로 옮겨왔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동생활을 했다. 독신 남자들은 칸막이도 없이 누울 자리만 있는 큰 막사에서 살았다. 결혼한 경우에는 두 가정이 오두막같은 집 하나를 나눠서 같이 사용했다. 이민자들은 조선에서 가져간 솥을 걸어 음식을 해먹었다. 남자들의 하루 품삯은 65센트에서 75센트 정도였다. 여자들은 50센트에서 65센트를 받았다.

노동자들을 감독하는 외국인 십장(什長:루나)들은 혹독하게 노동자들을 다뤘다. 일하는 동안에는 잡담이나 담배피우는 일이 일절 금지됐다. 이를 어기면 십장은 채찍을 휘두르고 주먹질을 해댔다.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져 있는 뱅고(Bango)를 차고 일을 했다. 노동자들은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에서 10시간동안 일했다.

주로 가시 덩쿨과 나무뿌리가 뒤엉켜 있는 황무지를 개간해 사탕수수 밭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이외에도 사탕수수잎 따기, 물대기, 사탕수수 베기, 사탕수수 운반 일을 했다. 새로 도착한 노동자들에게는 가장 힘든 김매기와 수수 잎 따는 일이 주어졌다. 사탕수수는 톱날같이 날카로워 몸을 베기 일쑤였다.

수수 잎 베기는 무더운 날씨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해야 하는 가장 힘든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피와 같은 노임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상해임시정부나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은 한인지도자들은 모두 하와이 한인이민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선생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들이 하와이 각 농장에 이민되어서 사탕농장에서 노동하는데 본국에서 지나던 처지가 무엇이었거나 계제를 찾을 것 없이 다 같은 농부들이 되어서 일을 감당할 수 있던지 없던지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낮이면 사탕 밭에서 살고 밤이면 농막에 들어가 밤을 지낼 때 피곤한 몸의 사지가 아프고 결려서 누었거나 앉았거나 편치 안 해서 전전 불매하던 것이 그들의 정경이었다. 그러한 형편으로 매일 10시간 일하고 69전을 받아 그날그날을 지냈으며 그같이 한숨과 눈물에 젖은 노력이 재미한인사회 건설과 조국광복 해외운동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한인이민은 1905년 7월을 끝으로 마감된다. 일본이 하와이 일본인 노동자들을 위해 조선인 이민금지를 조정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편 1902년부터 1905년까지 7천500여명의 조선인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이중 1천500여명은 미국 본토로 건너가게 된다. 이는 캘리포니아의 노임이 하와이에 비해 2배나 됐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몰려온 한인들은 공립협회나 대동보국회, 한인감리료 전도소의 도움을 받아 정착했다. 하와이 농장에서는 시키는 일만 하면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됐으나 본토에서는 그것이 힘들었다. 수만 명의 일본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다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네바다와 유타, 콜로라도로 떠났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록키산맥 일대의 철도부설 공사장이나 탄광노동자로 일했다. 극히 일부는 와이오밍주와 네브라스카 주 평원에서 농장을 임대해 농사를 짓거나 농부로 지냈다. 본토에 있던 이들은 이후 진행된 해외항일독립운동의 큰 자산이 됐다. 탄광에 있던 이들은 군사훈련을 자체적으로 실시하며 항일전쟁을 준비했다. 농사를 지어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이들은 자금을 대서 이들을 도왔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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