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진신부와 하와이 초기한인사회노총각만 득실…사진 보내 신부감 구하기 나서
신랑감, 사진보다 나이많고 가난…실망 커
악착같이 벌어 독립자금, 구제금모아 전달
최초 사진신부는 목포 출신 23세 최사라
초기 한인이민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남자 열 명에 여자 한명 꼴이었다. 5천300여명의 남자들이 외톨이로 살았다. 힘들게 일을 했어도 남자들은 마음 놓고 쉴 곳이 없었다. 자연 술에 취하고 노름과 아편에 빠지는 이들이 늘어났다. 싸움도 잦았다. 한밤중에 남의 농장에 들어가 ‘송아지 서리’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자연히 한인들의 이미지는 나빠졌다. 한인들이 하도 말썽을 자주 부리고 거칠게 굴기에 하와이 백인들은 한인들은 범죄를 쉽게 저지르는 민족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일당을 두 배나 주는 캘리포니아와 남미지역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꾼들이 대거 빠져나가자 농장주들은 한인노동자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농장주들은 한인노동자들이 하와이 현지 여인과 결혼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그 어떤 노동자도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한인사회에서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했던 ‘사진결혼’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모아졌다. 조선에 있는 여자와 사진을 주고받은 뒤 마음 맞는 여자가 있으면 하와이로 데려와 결혼을 하자는 것이었다.결과적으로 사진결혼은 대부분 사기극이었다. 한인 남자들은 말쑥한 양복을 빌려 입고 농장주의 집이나 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사진을 고치거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나이어린 동료들의 사진을 대신 보냈다. 조선의 여자들은 하와이에 가면 고생하지 않고 편히 살수 있다는 중매쟁이의 꾐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와이로 건너왔다.
1910년 12월 2일 최초의 사진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했다. 신부는 23살 된 최사라였다. 하와이 이민자들의 삶을 중심으로 해서 해외독립운동 지사들을 그린 소설 ‘아리랑’에서 조정래 작가는 최사라를 전남 목포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신랑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을 지낸 38살의 노총각 이내수였다.이후 동양인이민이 법으로 금지된 1924년 까지 1천여 명의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다. 사진신부 상당수는 영남지역 여자들이었다. 신부들은 사진 속 얼굴이나 편지의 내용과는 달리 노동에 찌들고 가난한 중년남자들이 신랑이라는 사실에 기가 막혔으나 대부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남편과 같이 농장에서 일하거나 세탁일,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돈을 모았다.
조선여인들은 자녀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여러 여성단체들을 결성해 독립기금을 마련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애를 썼다. 1919년 하와이에서 조직된 대한부인구제회는 떡과 밑반찬 등을 팔아 독립운동자금과 각종 구제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독립운동가의 활동자금과 수해의연금 등으로 건네진 돈이 당시 돈으로 20만 달러를 넘었다.한인여성들은 1913년 하와이에 건너온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철학박사이자 미남인 이승만에 대해 여인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해외독립운동 지사들로부터 배격을 받았던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성장해 결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와이 한인여성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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