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민족의 지도자 우성(又星) 박용만(朴容萬) 선생(上)한인 미국 초기 이민자들의 항일 독립운동과 나라사랑국권회복· 민족계몽에 몸 바친 위대한 사상가

美 네브라스카에 해외최초군사학교 세우고 독립군육성 
하와이에서는 대조선국민군단 운영, 일본과 전쟁준비
미국, 러시아, 중국 무대로 항일무장투쟁 기틀 닦아
시대를 꿰뚫은 저술과 사설로 국가·민족 발전방향 제시

▲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도열해 있는 소년병학교 교관과 학생들. 앞줄에 서있는 이들이 교관들이다. 왼쪽에서 세번째 인물이 박용만선생이다.
우성 박용만 선생은 한국 근세사에 있어 걸출한 사상가요 독립지사였다. 또한 유려한 문장의 사설로 국민계몽에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나라의 인재들을 육성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는데 바쳤다. 뛰어난 식견으로 조선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적 실천가이기도 했다. 무장독립투쟁이야말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아래 네브라스카와 하와이 등지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생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러시아와 만주에서는 애국지사들과 힘을 합쳐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오해를 받아 1928년 10월,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해외독립운동사에 있어 박용만 선생의 위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들은 박용만 선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이 전 대통령은 집권 후 박용만과 그 지지 세력을 철저히 소외시켰으며 이는 박용만 선생이 역사의 그늘에 묻히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박용만 선생은 1881년 강원도 철원읍 중리 109번지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15살 되던 해 숙부 박희병을 따라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박희병은 일본·미국 유학을 다녀온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박용만 선생은 중학교 졸업 후 게이오의숙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때 박영효등과 교류를 가졌으며 활빈당에 가입하게 된다.

선생은 박영효와 연루됐다는 혐의로 고종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1901년 옥에 갇힌다. 박희병의 도움으로 몇 달 뒤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나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에 나서면서 두 번째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감옥에서 만난 이가 이승만이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결의형제를 맺고 서로를 도왔으나 종내는 갈등관계로 빠지게 된다.

일본의 조선식민지화 야욕이 노골화되자 도박용만 선생은 1905년 2월, 미국으로 향한다. 도미 후 선생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찾아가 동학농민군 출신인 문양목, 백일규 선생등과 교분을 쌓았다. 숙부 박희병이 일본인 이민회사의 한인 멕시코 이민사기극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 1905년 9월 입국하자 함께 네브라스카 주 커니(Kearney)시로 가서 정착하게 된다.

1906년 선생과 숙부는 콜로라도주 덴버로 자리를 옮겨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한편 유학생회를 조직해 한인들을 규합한다. 같은 해 9월 선생은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고 부전공으로 군사학을 선택했다. 1908년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갖고 일제의 침략만행과 조선독립의 의지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널리 알렸다.

▲ 한인소년병학교 생도들의 사격훈련모습 소년병 학교의 첫해 생도는 모두 13명이었다. 가장 어린 생도는 열네 살의 김용성이었다. 생도 조진찬은 오십 세를 넘긴 농장노동자였다. 교관은 구한말 군인출신인 김장호와 커니군사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종철이었다.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아래 생활했다. 박용만선생은 한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총과 군복, 운동복 등을 구입했다.
애국동지대표회의 성과 중의 하나는 평소 박용만선생이 주장하던 둔전병(屯田兵)제에 입각한 군사학교설립 안이 통과된 것이다. 선생은 1909년 6월 커니시의 한 농장에 한인소년병학교를 마련했다. 이 학교는 해외최초의 독립군관학교로 여름방학 때 입소해 8주간의 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 체계였다. 수학과정은 3년제로 첫해 생도는 모두 13명이었다.

소년병학교는 커니 시에서 20Km 정도 떨어진 헤이스팅스 대학 측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 대학으로 옮겨왔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채를 통째로 한인병 학교에 내주고 이들이 공부와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 대학은 조선선교를 위해 한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일본 측의 항의로 소년병학교는 결국 1914년 여름에 문을 닫았다.

한인소년병 학교 졸업생은 40여명이다. 6년 동안 170여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3년제라 중복해 등록한 학생이 많아 실제 군사훈련을 받은 학생 수는 90명 정도이다. 소년병학교는 평상시에는 탄광이나 농장 노동자, 혹은 학생으로 일하다가 비상시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형식이었다.

▲ 1916년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사훈련 모습.대조선국민군단은 100여명으로 시작했으나 가장 많을 때는 300여명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낮에는 농장의 노동자로 일했으나 틈틈이 군사훈련과 일반과목 공부를 하면서 나라를 되찾는 힘을 기르는데 동참했다.
이 학교는 후에 만주 신흥무관학교 창설과 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년병학교 출신 대부분은 한국이나 재미한인사회의 지도자가 돼 조선독립운동과 나라발전에 기여했다. 또 일부는 졸업 후 만주나 러시아등지에서 독립군들을 이끌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박용만 선생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아 활동했다. 학업은 잠시 중단했다. 이때 많은 사설을 남겼으며 ‘국민개병설’과 ‘군인수지’라는 책을 저술했다. 또 자치정부의 형태로 ‘무형국가론’을 제창하고 정치·문화·경제혁명을 통해 조선의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12년 네브라스카주립 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자신의 원대한 뜻을 구체적으로 펼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난다.

▲ 대조선국민군단시절의 박용만 선생. 선생은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와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펼칠 수 있는 군사력을 키우는데 전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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