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애국지사9.민족의 지도자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 선생(下)

하와이에 일하며 훈련받는 대조선 국민군단 창설
주정부에서 특별경찰권 승인받아 한인자치제 실시
위임통치 승인한 임시정부와 결별, 독자노선 걸어
강병부국·경제발전·의식개조 강조…국가경영 귀감 삼아야

▲ 박용만과 이승만1913년 2월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 이승만을 환영하는 박용만 선생과 한인회 관계자들. 중앙의 인물이 이승만이고 맨 우측이 박용만 선생이다. 이승만은 하와이 정착과정에서 박용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한인사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박용만과 갈등관계에 놓이게 됐다.
박용만 선생은 1912년 12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13년 5월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한인자치제를 확립했다. 1914년 6월 하와이 아후이마누에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8월 29일에는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낙성식을 가졌다.

대조선 국민군단에 소속된 300여명의 한인들은 함께 농장에서 일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박용만 선생의 지도아래 조선독립을 위해 힘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박용만을 정적으로 여긴 이승만과의 갈등과 일본의 방해 등으로 인해 1917년 문을 닫고 만다.

선생은 이승만의 ‘조선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승인한 상해임시정부를 배격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군들을 양성하려는 야심찬 구상을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자금부족으로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8년 석연치 않은이유로 암살당하고 만다.

최근 들어 박용만 선생에 대해 연구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세계 열강의 패권주의가 격돌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 격돌하는 지금, 그의 사상이 대한민국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는 이 또한 많아지고 있다.

둔병제에 입각한 자강정신(自强精神)은 오늘날 국방력 강화를 통한 자주국방의 개념과 동일하다. 일찍이 선생은 조선독립은 조선민족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돌변하는 국제외교의 허망함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는 조선독립을 위해 조선 국내와 네브라스카, 하와이, 중국 만주, 러시아 등 해외에서 국민군을 양성해 일본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조선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의식개조와 민족 산업의 부강을 강조했다.

박용만 선생의 사상은 그가 운명한지 90년이 지난 지금, 국가 생존과 국가부흥을 위한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끊임없는 설득으로 한인사회를 단결시킨 그의 소통능력, 어려운 여건에서도 군사력을 키워낸 그의 정치력, 그리고 시대를 꿰뚫어보며 미래를 준비했던 그의 예지력은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본받아야할 부분이다.

▲ 대조선국민군단의 시가지행진대조선국민군단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시가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국민군단은 국민회 창설기념일에는 호놀룰루 시가지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곤 했다. 1917년에 촬영됐다. 대조선국민군단 학도 수는 적게는 100여명에서 많게는 300여명에 달했다. 교과내용은 박용만 선생이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과정을 발전시킨 것이었으며 교재는 28종에 달했다.

 

 

칼을 찬 독립사상가, 우성 박용만을 그리며
<박용만 기념사업추진회 한애라 사무처장>

 

이 글은 우성 박용만 기념사업추진회 한애라 사무처장이 과거에 기고했던 글을 부분적으로 수정해 옮긴 것이다. 한 사무처장은 박용만 선생과 관련된 국내외 자료를 가장 많이 수집해 정리하고 있으며 20여년에 걸쳐 그의 생애를 꾸준히 연구해오고 있다.

우성(又醒) 박용만, 그는 1881년 7월 2일 강원도 철원 중리에서 태어나 일본과 미국, 러시아와 중국을 넘나들며 비탄에 젖어 있던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독립 사상가이며 민족지도자였다. 당시 독립운동의 3가지 방략은 외교론의 이승만, 실력양성론의 안창호, 그리고 무장투쟁론의 박용만으로 대표된다. 1996년 TV에서 방영된 ‘박용만 평전’이라는 다큐멘터리 내용 중엔 하와이에 거주하는 100세를 넘긴 한 할머니의 증언이 기억에 남는다.

“이승만·박용만·안창호… 그 때 이 세 사람의 싸움이 대단했지. 하지만, 이승만·박용만·안창호, 이 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우리의 지도자야…” 이 증언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박용만에 대한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항일무장투쟁론자로만 알려진 박용만은 일본 게이오대학과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운 국제적 지식인이다. 그래서 그의 ‘독립전쟁론’은 국제적인 안목과 이론이 뒷받침이 된 가장 적절한 독립방략이었던 것이다. 이는 독립을 위한 방법 중에 가장 적극적이며 실천적인 방법이었다.

대한독립을 위한 박용만의 추진력은 역사상 해외 최초의 무관학교이며, 독립군 기지인 ‘한인소년병학교(네브라스카)’와 ‘대조선국민군단(하와이)’ 그리고 ‘대조선독립단(하와이)’을 창설하게 한다.

또한, 그는 1911년부터 ‘신한민보’를 통해 ‘무형국가론’을 주창해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게 만든다. 이는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박용만은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된다. 그러나 외교적 노선을 선택한 임정의 외무총장 자리를 사임하고, 만주와 노령 등지에 산재한 독립군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군사통일회의’를 북경에서 결성한다. 실질적인 항일투쟁이 그에겐 임시정부의 감투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1928년 10월 17일, 북경에 ‘대본공사’를 운영하면서 독립군기지개척과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던 박용만은 일제의 이간에 의한 비통한 죽음을 맞았으며 이는 대한독립운동의 큰 손실이 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박용만의 업적과 영향에 대한 대대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계에선 가장 위대한 독립지도자로 우성 박용만을 지목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만큼 박용만은 정치사상, 언론, 군사, 국문연구, 경제학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최고의 지성이자 실천하는 지도자였다. 유명 연예인이 밥만 먹고 가도 이를 알리는 요즈음, 이렇게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인물에 대한 선양사업을 아직 하고 있지 않다. 텃밭과 비닐하우스로 변해버린 생가 터는 그를 잊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가 묻힌 곳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우성 박용만, 그는 불세출의 독립지도자였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를 이제라도 우리는 기억하고 그의 사상과 위업을 선양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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