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네브라스카 커니 시의 한인소년병학교(上)커니 시 농장에 울려 퍼진 한인들의 우렁찬 군가

 

▲ 커니시의 농장에서 소년병학교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총을 세워 두고 체조를 하면서 몸을 풀고 있는 장면.이들은 남북전쟁 때 사용됐던 스프링필드 장총을 구입해 사용했다.소년병학교 첫해 생도는 13명이었다.이 학교는 1910년 4월 헤이스팅스 대학 구내로 옮겨갔다.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박용만 선생이다.

1909년 박용만 선생 외곽농장에 군사학교 설립
해외최초무관사관학교, 항일독립투쟁 산실로 발전
본보, 한인소년병학교 정확한 위치 처음으로 파악

지난 7월 14일 네브라스카주 링컨시에 도착했다. 링컨공항에 도착하니 가슴이 벅찼다. 콜로라도 덴버공항에서 링컨 시로 향하는 유나이티드 항공사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기자는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박용만 선생과 한인들이 힘을 모아 세웠던 소년병학교가 있는 네브라스카 주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니 설레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링컨공항은 아주 작았다. 광주공항 정도의 규모였다. 공항을 나와 셔틀버스를 타고 링컨시 중심에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로 향했다. 도심은 현대식 빌딩과 오래된 건물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고풍스러웠다. 110년 전, 박용만 선생과 한인 유학생, 노동자들이 이 곳을 거쳐 커니시와 헤이스팅스, 그리고 철도공사장이 있었던 오마하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시전체가 정겹게 느껴졌다.

다음날, 호텔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커니시로 향했다. 링컨시 소재 한인교회 목사님이 동행해주셨다. 덴버에서 출발하기 전 통화를 해 네브라스카 한인 유적지 취재를 도와주실 수 있겠느냐고 미리 연락을 드린 상태였다. 목사님은 아주 흔쾌히 승낙하셨고 굳이 차를 빌릴 필요가 있겠느냐며 본인의 차를 직접 몰고 나오셨다.

커니시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80번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쯤 달렸을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돌풍과 함께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과 1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후두둑 쉴 새 없이 어른 주먹 크기의 우박들이 쏟아져 내렸다. 차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20분 정도 우박이 내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가 화창해졌다. 차를 살펴보니 수십군데가 패여있거나 흠집이 생겨 있었다.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 옛날 우리 선인들도 네브라스카 대평원에서 이런 우박을 맞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 역시 반가운 일의 하나로 여겨졌다. 마침내 커니시에 도착했다. 맨 처음 들른 곳은 커니시립도서관이었다. 커니시를 찾은 가장 큰 목적은 1909년 문을 연 한인소년병학교(Military School for Korea Youth)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1905년 박용만 선생은 숙부 박희병이 조선에서 네브라스카주 출신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소개서를 가지고 커니시 인근에 있는 오마하의 유니언퍼시픽 철도회사를 찾아간다. 박용만 선생의 요청에 따라 유니언퍼시픽 철도회사는 커니시 철도공사장에 김병희와 조진찬, 권종호, 정영기 등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이것이 커니시에 한인들이 모여 살게 된 이유다.

커니시에 정착한 한인들은 철도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일부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박용만 선생은 커니시의 유지들에게 부탁해 정한경과 유일한, 이관수 등을 스쿨보이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스쿨보이는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방과 식사를 제공받는 아이들을 말한다.

1909년 박처후와 임동식 등은 커니시 외곽의 농장을 장기임대 받았다. 박용만은 조진찬을 농사 책임자로 정한 뒤 농장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박용만과 정한경은 네브라스카 주정부, 커니시와 교섭해 군사학교 인가를 받아냈다. 당시 커니시의 인구는 6천여 명이었는데 네브라스카는 학생들의 군사훈련 실시가 매우 보편화된 지역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은 전투경험이 없는 장교들로 인해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전쟁 후 미 연방정부는 네브라스카주 등 중부 7개 지역에 주립대학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군사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고등학교에서도 군사훈련이 실시됐다. 네브라스카는 동양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또한 학생들이 군복을 입고 훈련받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는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인노동자들이 남북전쟁 때 사용됐던 장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인해외독립운동사에 있어 커니시의 한인소년병학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소년병학교가 법원으로부터 서쪽 1마일 지점에 위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해서 막연하게 위치를 추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커니시 도서관 사서 베스 로젠틀(Beth Rosenthal)은 1909년 당시 지도를 참조로 해서 'Buffalo County 9th Avenue, 16th Street'가 당시 한인소년병학교가 위치해있던 장소라는 것을 밝혀냈다.

기자는 부리나케 그 장소로 향했다. 농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 장소는 이미 주택가가 돼버렸다. 110년이 지난 지금, 농장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큰 나무 한그루가 그곳에 있어 예전에 그 주변이 농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기자는 그곳에서 한인들의 우렁찬 구령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인들의 뜨거운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감격적인 커니시에서의 오후였다.

▲ 소년병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농장 터.농장 흔적을 찾을 길 없지만 큰 나무 한그루가 서있어 예전에는 농장 터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 커니시‘BuffaloCounty9thAvenue,16thStreet’일대.1909년 당시 한인 소년병 학교가 있었던 이곳은 지금 주택가로 변해 버렸다.

 

▲ 소년병학교가 위치해 있던 곳을 추정해볼 수 있는 커니시 당시 지도.화살표 아래 붉은색 원 안이 한인들이 임대해 사용하던 농장이다.3만평 정도이다.

 

▲ 커니시립도서관 전문사서인 베스는 1909년 당시 제작된 커니 시 지도와 각종 기록을 참조해 최혁 주필에게 소년병학교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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