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의 한인소년병학교(上)


헤이스팅스 대학에 울려 퍼진 대한남아의 함성
대학 측 건물·가구 제공하며 한인소년병학교 유치
매년 30~40명 입학, 1911년 여름 첫 졸업생 배출
美 곳곳서 유학생 몰려와 여름 5주동안 훈련받아

 

한인소년병 학생들의 헤이스팅스 대학 내 열병식
한인소년병학교 교관과 학생들이 대학구내에서 열병식을 갖고 있다. 대학 측은 건물 한 동을 소년병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또 소년병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 일부를 그대로 인정해 학사관리에 반영하기도 했다.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시의 외곽농장에 위치해 있던 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으로 옮겨졌다. 헤이스팅스대학은 장로교 계통의 재단에서 세운 학교로 커니시에서 동쪽으로 20㎞ 떨어진 곳에 있었다. 헤이스팅스 대학측은 조선 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측은 커니시의 한 농장에 조선인들이 모여 농사와 군사훈련을 같이 하며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소년병학교를 대학으로 유치하기 위해 박용만 선생과 접촉했다.

헤이스팅스대학 재무이사 존슨박사(P. L. Johnson)
박용만 선생 등 한인 지도자들에게 소년병학교를 헤이스팅스 대학 구내로 옮길 것을 제안한 헤이스팅스대학 재무이사 존슨 박사(P. L. Johnson).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존슨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 소년병학교 학생들을 잘 보살펴준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헤이스팅스 대학 재무이사인 P. L. Johnson 한인들에게 건물 한 동(Ringland Hall)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 20에이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건물 한 동을 통째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전이었다. 거기다 침대와 식탁, 주방기구 일체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커니시 한인들은 소년병학교 이전을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헤이스팅스 대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한인소년병 학교는 1910년 4월 1일 헤이스팅스 대학 구내로 옮겨왔다. 링컨시와 커니시에 살던 유일한과 정양필이 합류했다. 거기다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오하이오, 미시건, 뉴욕, 펜실베니아, 일리노이주에 거주하던 한인유학생들도 여름방학기간 동안 소년병 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모두 26명이었다.

교사진도 늘어났다. 최익현의 문하생인 김현구와 와이오밍주 슈피리어 탄광에서 일하던 한학자 박장순이 교관으로 합류했다. 커니시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조진찬도 헤이스팅스로 이사를 와 유은상, 임동식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헤이스팅스 대학 내에 위치한 한인소년병학교 관련 소식은 커니시의 미국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소년병학교가 옮겨온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7월 1일자 헤이스팅스 트리뷴지는 ‘한인소년병학교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소년병학교 관련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한인소년병 학교는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제자리를 찾은 듯이 보인다. 이 학교에서는 3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 학교의 학과목은 주로 대학준비과정 과목으로 짜여져 있다.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는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맡고 있는 김장호 교관이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커니시에 있는) 블리스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소년병학교 관계자들은 이번 여름학기 입학생들의 수에 만족하고 있으며 내년 여름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입학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링랜드 건물
헤이스팅스 대학이 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의 기숙사 겸 교실로 제공한 링랜드 건물(Ringland Hall). 지금은 헐어지고 없다. 건물자리에 대학 측이 세운 링랜드 건물 기념석이 놓여 있다.
소년병 학교에 대한 소식은 한인들에게 신한민보를 통해 자주 소개됐다. 신한민보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1909년 창간한 신문으로 한인들의 주요 소통수단이었다. 신한민보 1912년 7월 29일자(제 274호 3면)에는 ‘소년병학교 구격대’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 지방에 유학한 동포들은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전과 같이 소년병 학교를 열고 심담을 연마하여 타일반도에 분투 활동할 건아와 용사를 배양하는데 근일에는 격구대(擊球隊)를 조직하고 주무원 박용만씨와 판단원 정희원씨와 서기 리종열씨가 각 용사의 기예 평업을 고찰한다 하며…(中略) 이상재 용사는 소년병 학교 귀학 후 백인격구대와 15차를 경쟁하여 12차를 득승하고 2차는 비기고 1차만 패하였는데 얻은 점수는 평균 72점이요 패한 점은 보통 50점이니 소년병 학교 격구대의 용감한 기상은 세상에 자랑할 만하더라”

박용만 선생은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가 성공적으로 시작되자 한인들에게 소년병학교를 알리는 한편 후원금을 얻기 위해 2개월 동안 캘리포니아와 로스엔젤리스 등을 순회했다. 그 결과 총 16정과 후원금 600여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헤이스팅스로 돌아온 선생은 후원금으로 학생들에게 군복과 야구복을 지급했다. 교관들에게는 얼마의 급료도 지급했다.

헤이스팅스 대학도서관장과 최혁 주필
남도일보 최혁 주필이 헤이스팅스 대학 로버트 네더르먼 교수와 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로버트 교수는 이 대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는데 소년병학교 관련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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