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박용만 선생의 생애와 평가(上)항일전쟁위해 美·中·露에 독립군기지 설립·추진

네브라스카와 하와이에 군사학교 세워 무관양성
정치학 전공, 장교과정 밟으며 지도자 자질 쌓아
이승만과 갈등, 상해임정 대립 이유로 평가 소홀

 

▲ 네브라스카주 주도(州都)링컨시 모습. 중앙에 있는 건물이 주청사이다.주청사로부터 북쪽으로 1km떨어진 곳에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이 위치해 있다. 1910년대 링컨시에는 40여명의 한인 유학생들이 살고 있었다.대부분 박용만 선생이 운영하던 한인학생 기숙사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박용만 선생의 삶은 활동무대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콜로라도와 네브라스카 주에서 살던 시기(1905~1912.12),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시기(1913~1919.5),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과 중국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세력을 규합하다가 암살당한 시기(1919~1928)다.

그의 위대함은 선지자적 예지와 강한 실천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는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 스스로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자질을 닦았다. 1908년 네브라스카 주립대에 입학해 ROTC과정을 이수하면서 각종 군사지식을 습득했다.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시의 한 농장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에 앞장설 수 있는 인재들을 키웠다. 이 학교는 6년 동안 유지됐으며 170명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를 졸업한 수는 40여명으로 후에 모두 한국이나 미국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학교는 해외최초의 무관양성학교였으며 후에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설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정치학(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면서 세계의 정치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키웠다. 조선이 일본에 먹히고 만 1910년, 박용만 선생이 ‘무형국가론’을 들고 나온 것은 그의 예지력과 문제해결능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나라가 없어져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조선을 자주국가로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를 고심한 끝에 무형국가론을 내놓았다.

무형국가론은 국토가 없는 상황이니 우선 백성과 법률만으로 국가를 삼자는 주장이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에 나서자는 것이 핵심내용이었다. 그는 네브라스카 주립대를 휴학하고 1911년 2월 샌프란시스코로 가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대한인국민회는 그해 11월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을 발표하고 해외한인의 대표기관임을 내외에 밝히게 된다.

박용만 선생은 1912년 12월 하와이로 건너갔다. 아무래도 한인들이 많은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것이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더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와이 도착 후 선생은 국민보 주필로 일했다. 한인들의 단합과 민족성 개조를 강조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동시에 1914년 하와이 아후이마누 농장에 미국군대를 모방한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하고 향후 있을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을 배양했다.

▲ 박용만 선생은 네브라스카 주립대 3학년이었던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게 된다.선생은 당시 무형 국가론을 주장하는 한편 국민개병설 등의 저서를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했다. 자신이 운영하던 링컨시 한인 기숙사 서재에서 책을 쓰고 있는 박용만 선생. /한애라씨 제공

하와이 한인들은 선생의 지도아래 농장 일을 하면서 틈틈이 군사훈련을 받으며 조국광복의 의지를 키워갔다. 대조선국민군단에는 최고 4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평소 자신의 소신대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둔전병제에 입각한 자치정부사회로 변모시켰다. 선생의 노력으로 한인사회는 하와이주정부로부터 자치권을 허락받는 등 상당한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913년 이승만이 나타난 뒤 한인사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를 장악했다. 국민회를 사조직화하고 재정을 사유화했다. 이승만은 박용만 선생을 제거하기 위해 갖가지 책략을 꾸몄고 결국 이는 한인사회의 대립과 갈등으로 작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은 결국 미주한인사회가 안창호·박용만·이승만 계열로 3분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해외한인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 박용만 선생의 졸업앨범에 실려있는 네브라스카 주립대 ROTC학생들의 여름 군사훈련 모습. 선생은 ROTC학생들과 함께 링컨시와 오마하시 중간에 있는 야외에서 훈련을 받았다.선생은 ROTC군사훈련을 통해 군사 지식을 습득하는 한편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쌓았다. /네브라스카 주립대 제공

박용만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사력이 있어야 한다며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네브라스카주와 하와이주에 설립했던 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은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지휘관과 병사들을 육성하는 군사학교였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지역은 조선과 너무 멀어 독립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런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위해 1910년 초반부터 간도지역의 독립군기지 건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선생은 샌프란시코에서 신한민보 주필로 일하던 1911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복(본명 김규흥)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둔전병제에 입각한 중국내 독립군기지 건설을 논의했다. 하와이에서도 선생은 해외독립지사들과 연락을 갖고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선생은 마침내 1919년 하와이및 조선국내,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한 대조선독립단을 결성하고 그해 7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 1911년도 네브라스카 주립대 졸업앨범. 좌측 위에서 두번째가 박용만 선생이다. 한학기 휴학을 한 관계로 실제로는 1912년에 졸업했다.

▲ 링컨소재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도서관 사서 조시 케스털씨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박용만선생 관련 자료를 발굴할 수 있었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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