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경복궁 복원사업 포함 등 적극 지원 나서야
본래 자리에는 청와대 들어서…문화재지정부터 서둘러야

 

▲ 1928년 7월의 융문당
1928년 7월 께 찍은 융문당.헐려지기 한달전 모습이다.방치되어 있어 온갖 잡초가 무성하다.<문화재청‘궁.능 관련 유리원판도록>1997년.
▲ 1928년 7월의 융무당
1928년 7월 찍힌 융무당.북궐도형및 궁궐지에서는 정면 5칸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모든 사진에는 융무당은 정면 4칸으로 돼 있다.

■ ‘융문당·융무당’ 문화재 등록 추진 상황

문화재청은 지난 2006년 6월 19일 ‘융문당·융무당’ 등 5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고 ‘한강 철도교’ 등 8건과 영·호남 지역에 있는 9개 마을의 ‘옛 담장’ 등 17건을 문화재로 등록고시했다. 당시문화재청은 등록사유로 ‘융문당·융무당은 경복궁의 옛 시설로써 군사들의 열병과 과거시험장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라고 명기했다.

또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 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되는 건축물로 조선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등록사유를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같은 날짜의 관보와 문화재청 공고 제 2006-163호에 실려 있다.

관보에 명시된 등록내용에 따르면 융문당·융무당이 위치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55이다. 건물규모는 2동 1층이며 연면적은 융문당이 150.08제곱미터, 융무당이 78.35제곱미터로 돼 있다. 소유자는 원불교재단, 관리자는 서울특별시장이다.

▲ 영상성지의 융문당전남 영광군 백수읍 원불교 영산성지에 있는 융문당. 현재는 원불교창립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문화재청은 ‘등록 예고된 문화유산에 대하여 앞으로 30일 동안 소유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 등록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조사·등록을 통하여 근대문화유산의 보존에 적극 노력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당시 등록예고를 하면서 융문당·융무당에 대한 기록을 첨부했다. 이는 1934년에 편찬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474~476쪽) ‘명치 43년의 정리’와 조선지방행정학회가 1937년에 지은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동아일보 1928년 8월13일자에 실린 ‘유서 깊은 융무·융문당 철훼’ 기사 등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용산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산재개발사업으로 전남 영광으로 이전하게 되자 ‘이전 후 재신청하라’는 통보만 내리고 사실상 관심의 끈을 놓아버렸다. 원불교교단 측에서는 ‘재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지 못했는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화재청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 옥당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융문당 용머리영산성지로부터 7Km서쪽에 위치해 있는 옥당박물관 내에는 융문당,융무당 복원공사를 할 때 따로 떼어놓은 용머리가 보관.전시돼 있다.
▲ 2006년의 문화재청 공고문화재청은 2006년 융문당·융무당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예고 했으나 영광 이전을 이유로 취소한 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남 영광군 역시 ‘융문당과 융무당’이 원불교교단 소유인만큼 원불교측에서 문화재등록신청을 하지 않으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영광군은 뒤늦게나마 지난해 비지정문화재 학술조사를 대한문화재연구소 측에 의뢰해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융문당과 융무당 두 건물은 경위야 어찌됐든 원불교 측이 지난 1946년부터 관리해 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정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원불교 측에 상당한 공이 있다. 원불교단은 ‘역사제자리 찾기’와 ‘경복궁 복원’ 차원에서의 융문당·융무당 반환에 긍정적이다. 다만 이에 상응하는 정부의 조치가 뒤따라야한다는 입장이다.

■ ‘융문당·융무당’의 역사

조선이 개국하면서 태조는 경복궁을 지었다. 지금의 청와대 일대는 궁의 후원으로 삼았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전소됐다. 완전히 불에 타버렸다. 270년 동안 폐허 상태로 방치됐다. 고종 2년인 1865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 건춘, 신무, 영추문등 4개의 문과 북원(北苑) 건물을 세웠다.

대원군은 현재 청와대 지역인 신무문 밖 후원을 북원이라 이름 짓고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 중일각(中日閣), 오운각(五雲閣), 춘안당(春安堂) 등을 세웠다. 융문당은 문과 과거 시험을 보는 곳으로, 융무당은 군사시범훈련을 참관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이때 경무대(景武臺)도 같이 들어서게 됐다.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무과시험을 보는 곳으로 사용됐다.

1910년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 총독부를 지었다. 1928년에는 융문당과 융무당 등 후원의 건물을 모두 헐어버리고 총독관저를 지었다. 헐어버린 전각은 일반에 매각해버렸다. 일제는 두 건물을 헐어 용산에 일본인을 위한 절 용광사(龍光寺)를 짓는데 사용했다. 일본의 불교교단 진언종(眞言宗)소속 융흥사(隆興寺)는 인부들을 동원해 융문당과 융무당을 마구잡이로 헐어내 목재를 실어 날랐다. 용광사 건물 안에는 불상이 앉혀졌다.

광복 후 원불교 서울교당은 용광사를 사들여 융문당은 법당으로, 융무당은 생활관으로 사용했다. 융문당·융무당이 있던 용산구 한강로 2가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2006년 전남 영광군 백수의 원불교 성지로 옮겨졌다. 부지가 넉넉하지 않아 융문당은 영산성지에, 융무당은 영산성지에서 7Km떨어진 옥당박물관 내에 세워졌다.

당초 원불교 교단은 융문당과 융무당을 서울에서 영광으로 옮겨오면서 문화재청에 협의를 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현재 융문당과 융무당이 문화재가 아닌 만큼 소유자 뜻대로 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전해왔다고 한다. 원불교 측은 5억여 원의 이전·공사비를 들여 1년 동안 공사를 한 뒤 2007년 9월 현재의 위치에 두 건물을 다시 세웠다. 현재 융문당은 원불교창립관으로, 융무당은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찻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 동아일보는 1928년 8월 13일자 ‘유서깊은 과거터 융무,융문 양당 철훼’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가 일본불교종단 진언종에 융문,융무당을 무상으로 대여키로 결정한뒤 융문당과 융무당이 마구잡이로 헐려지고 있다고 통분했다.

■ ‘융문당· 융무당’의 원래 자리는 현재의 청와대

지금 청와대 건물의 상당수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의 청와대 부지는 고려시대에는 궁터였고 조선시대에는 궁궐 후원이었다. 1426년(세종8년) 경복궁이 창건될 때 연무장, 융무당, 경농재, 과거장 등이 왕의 친견장소로 쓰여졌다. 1927년 일제총독이 오운각 외의 모든 건물을 헐고 관저를 지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장관의 관저가 됐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으며 경무대로 불려졌다. 경무대는 융문당과 융무당,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넓은 공터(군사조련장)을 포함한 매우 넓은 곳이었다. 고종 29년(1892년)에 지은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지역에 경무대라는 표기가 돼 있다.

1960년 4.19혁명 후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개칭했다. 지금 청와대 내의 녹지원은 과거 경무대의 일부이다.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저리와 앞편의 넓은 마당에는 현재 녹지원과 경호실, 비서실등이 자리하고 있다. 1989년 청와대 신축공사 중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祉)'라는 문구가 새겨진, 400여년 전에 제작된 표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 옥당박물관의 융무당
융무당은 옥당박물관내에 자리하고 있다.문화체험을 하는 장소와 찻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복궁 역사 및 일제의 훼손

청와대가 위치한 현재의 세종로 1번지 일대는 대대로 궁궐 터였다. 처음 궁궐이 들어 선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쯤이다. 고려 왕조는 이곳에 이궁(離宮)을 세웠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과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 곳을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숙종때 동경대신 이곳에 이궁을 두고 남경으로 삼았다. 충렬왕이 삼경제를 폐지하면서 잠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 째인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만들고 새로운 수도건설에 나섰다. 궁궐터를 물색하던 정도전(鄭道傳)등은 고려 숙종 때의 이궁 터는 너무 좁아 새로운 궁궐을 짓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좀 더 남쪽에 있는 야산을 평평하게 만들어 궁궐을 짓기로 했는데 이 궁궐이 경복궁이다.

그러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고 만다. 이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게된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 중건에 나선다. 당초보다 더 웅장하고 크게 세워지지만 경복궁은 조선의 몰락과 함께 제 모습을 잃어버린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은 사실상 방치돼 또다시 폐허로 변하기 시작한다.

1890년대에 그려진 북궐도형(北闕圖形)에 경복궁의 건물 수는 모두 509동(6,806칸)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건물 수는 40여 동(857칸)에 불과하다. 일제는 1910년 전각 6,806칸 중 4,000여 칸을 경매 처분했다. 1914년에는 자선당과 비현각 등 15동의 건물과 문 9개소를 매각했다.

이때 홍문관(옛 집현전)과 비현각(세자 집무실)은 남산 '화월병장'과 장충동 '남산장'으로 팔려 나가 일본 기생집으로 변하고 만다. 융문당·융무당은 일본 사찰과 객전으로 추락하고 만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일본인 절, 박문사의 일부로 바꿔진다.

동궁 자선당은 일본으로 반출돼 사설 미술관 조선관으로 사용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에 타고만다. 지난 1996년 초석만 경복궁 뒤뜰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에 469동이 헐려졌으나 대다수 전각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로 경복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일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현재의 청와대에 총독관저를 세웠다. 그리고 총독관저를 대(大)형상으로 지었다. 경복궁 대부분을 헐어버리고 총독부 건물을 일(日)자를 본떠 세웠다.

그리고 조선의 육조관청이 들어서 있던 곳에 경성부 청사(현 서울시청)를 본(本)자 형태로 만들었다. 조선의 궁궐과 국가체계를 철저히 유린하고 그 위에 ‘대일본’(大日本)을 형상화시킨 건물을 세운 것이다. 정부는 1차 경복궁 복원 사업을 1990부터 2010년까지 벌였다. 2011년 시작된 2차사업은 2030년에 끝날 예정이다.

■궁궐의 서열

궁궐의 건물에는 서열이 있다. 그 서열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이 붙여진다.

‘전’(殿)은 가장 높은 서열로 왕이나 왕비가 거처하거나 정사를 보던 건물에 칭해진다. 전은 궁궐의 여러 건물들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다. 왕의 즉위식, 세자의 혼례식 등 왕실의 주요한 의전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또 조회 등 왕이 공식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당’(堂)은 전에 비해서 그 격(格)이 한 단계 떨어진다. 의전행사장소라기보다는 일상 업무나 기거용으로 더 많이 쓰였다. 왕이 가까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는 곳을 연거지소(燕居之所)라고 하는데 연거지소에는 대부분 당호가 붙는다. 집을 반으로 나누어 앞쪽을 당(堂)이라 하고, 뒤쪽을 실(室)이라 한다.

'합(閤)'은 대체로 전에 부속되어 있는 건물이나 완전히 전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독립되어 있는 집이다. 각(閣)'은 규모 면에서 전이나 당보다는 떨어진다. 용도로는 왕실과 관련된 물건을 보관하거나 관측시설이 있는 곳이다.

‘재’(齋)는 주요 인물이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독립된 건물이다. 통상 숙식이 가능하다. 출가하지 않은 대군·공주·옹주들의 집이거나 격이 높지 않은 후궁의 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헌’(軒)은 전(殿)의 좌우에서 이를 보좌하는 형태인 익각(翼閣)이거나 따로 독립된 건물이다.

‘루’(樓)는 글자가 이름에 붙은 집은 온돌이 아니라 지면에서 사람 키 높이의 마루로 된 건물이다. 온돌형태가 아니다. 되어 있는 형태이다. ‘정’(亭)은 흔히 ‘정자’를 일컫는데 경관이 좋아 휴식·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집을 말한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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