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조선독립·발전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요람19. 박용만 선생과 하와이 대조선 국민군단(中)


한인들 피 값 임금모아 조선 수재해 때마다 거액송금
박용만 선생 중심 아후이마누에 대조선국민군단 설립
300여명 농장일과 군사훈련 병행하며 독립전쟁 준비

 

▲ 대조선국민군단이 위치해 있던 아후이마누오하우섬 아후이마누 마을 모습.100여년전 박용만 선생이 세웠던 대조선국민군단이 자리했던 곳이다.이민1세 박종수씨는 120여만평의파인애플 농장중 90여만평을 국민군단 숙소및 훈련장소로 내놓았다.지금은 주택단지로 변해버려 국민군단 흔적을 찾을길이 없다.

한인 미국초기이민사를 연구하면서 항상 아쉬었던 것이 하와이에 있는 대조선국민군단의 옛 병영 터(농장)를 가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난 2000년부터 10년 동안 미국에서 대학연구원으로, 또 현지 신문사의 기자로 근무할 때는 캘리포니아를 비롯 네바다와 유타, 와이오밍, 아이다호, 콜로라도, 뉴멕시코 주 등 서부 곳곳을 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한인초기 이민의 주요무대인 하와이는 좀처럼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어디서 연구자금을 지원받는 것도 아니어서 하와이를 방문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1주일 정도만 머물러도 항공료를 포함해 족히 2,000달러는 들어가는데 생업을 제쳐놓고 이를 감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다보니 하와이 한인들의 이민생활사는 책자나 TV다큐멘터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는 풍부했으나 현장을 보지 못한 탓에 항상 무엇인가 아쉬었다.

▲ 오하우섬에 있는 ValleyoftheTemples.일본 사찰로 가는 중간에 한국인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 5월, 4일 동안 하와이 현지를 답사할 기회를 갖게 됐다.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내리는 순간 가슴이 설랬다. “드디어~”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와이 도착 후 와이키키 해변에 있는 힐튼호텔에 짐을 풀었다. 서둘러 박용만 선생과 함께 한인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던 대조선국민군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미 저녁시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와이키키 해변 근처의 모아나 도로(Moana Blvd.)를 타고 차를 몰다가 H-1 고속도로 서쪽으로 향했다. H-1고속도로에서 다시 H-3번 고속도로를 타고 하와이를 남쪽에서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길은 가파르고 험했다. 깍아지른 사화산 사이를 뚫고 길을 낸 것이라 굽이 길도 많고 경사가 심하다. 그렇지만 경치는 무척 아름답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보았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는 듯싶다.

▲ 하와이에 이민온 한인1세와 후손들이 한국인 묘역에 잠들어있다.

쿨라우 산맥(Koolau Mountain Range)은 오하우 섬의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걸쳐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1,200m에 달한다. 산들은 진녹색의 수풀로 뒤 덮여 있다. 높은 산들인데 가파르다 보니 전체적으로 장엄하다. 감탄을 연발하며 30여분 정도 차를 몰고 가다보니 어느새 카할루(Kahaluu)로 접어드는 길에 도착한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넓은 묘지가 있어 그곳으로 차를 향했다.

윈드와드 묘지(Windward Mortuary)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본불교사찰(Valley of the Temples)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 묘지관리인을 만나 한국인묘역을 물어보니 앞장서서 기자를 안내해준다. 한국인 묘역(Korean Memorial Garden)은 넓었다. 수백 여 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02년 하와이로 이민을 온 1세대와 이후 그 자녀들이 묻혀있는 곳이기에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중에는 박용만선생과 뜻을 같이하며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구슬땀을 흘렸던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학생이나 교관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한국인 묘역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묘석을 살피며 몇 걸음을 떼다보니 위령비 겸 망향비가 보인다, 1980년에 세운 것이다. 위령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한국인 묘역에 놓여진 한인 위령비겸 망향비.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듬뿍 담겨져 있다.

“일찌기 자유와 행복과 번영을 찾아 하와이로 왔던 한인들이 여기 잠들다. 이 정의의 땅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면서 그들은 지혜와 열성과 끈기를 보여 주었고 알로하의 정신에 한인의 얼을 더하였다. 하와이 사회건설에 이바지한 그들의 빛나는 공로위에 오늘날 그 후예들이 자랑스레 서 있으니 이들이 선조의 고결한 삶을 기려 이곳에 비를 세우다

일어나 가자 멀고 높은 곳으로

우리가 자라고 살며 살고 자란 곳으로

일천구백팔십년“

하와이 이민 이후 78년 만에 세워진 위령비다. 비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실로 깊다. 멀고먼 타국에 와서 살면서도 조국의 산천과 가족들을 그리워하던 이민 1세들의 처절한 마음과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던 후손들의 마음이 듬뿍 담겨져 있다.

숙연한 마음으로 묘역을 나와 잠시 차를 몰고 가니 드디어 아후이마누(Ahuimanu) 표지판이 보인다. 아후이마누는 대국민조선군단이 들어서있던 곳이다. 아후이마누 농장 90만평을 대조선국민군단 훈련기지로 내놓은 인물은 박종수다. 평양출신인 박종수는 하와이이민 1세대로 근면한 사람이었다. 평판이 좋았던 박종수는 파인애플 제조회사였던 리비&맥넬(Libby $M’cnell)회사로부터 농장 120만평을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박용만선생의 뜻을 전해듣고 선뜻 90만평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아후이마누 마을에서는 대조선국민군단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예전의 농장터는 모두 주택가로 변해 버렸다. 주민들을 찾아가 예전에 한인들이 모여살던 농장이야기를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두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며 신기해 할뿐이다.

박종수의 헌신적인 뒷받침과 한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박용만선생은 1914년 6월 10일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했다. 2개월 뒤인 8월 29일에는 병영낙성식을 가졌다. 한인들은 박종수농장에 병영을 건설하고 사관학교를 세우는 일을 ‘산넘어 일’이라 불렀다. 호놀룰루에 살던 한인들은 군단원들을 ‘산넘어 아희들’이라 불렀다.

‘산넘어 아희들’이 농장에서 함께 살면서 파인애플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을 받던 대조선국민군단 병영은 조선독립에 몸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이 민족혼을 불태우던, 애국의 현장이었다. 그 현장에 서서 조선독립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던 선인들을 생각하니 감회가 깊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과연 몇이나 알고 있을까?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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