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체격과 용맹한 담력으로 독립전쟁 준비하자"20. 박용만 선생과 하와이 대조선 국민군단(下)


300여명 한인, 농장 일과 군사훈련 병행
각종 행사에 군복입고 시가행진…위용 뽐내
日, 美에 압력 16개월 뒤 카후쿠로 이전

 

▲ 카후쿠 마을의 대조선국민군단 농장자리1914년 오하우섬 아후이누 마을에 조성됐던 대조선국민군단은 1915년 10월 카훌루에서 20여km떨어진 카후쿠 지역으로 옮겨진다. 일본은 미정부에 압력을 넣어 한인들의 군사훈련기지 폐쇄를 요청했었다.카후쿠 대조선국민군단 자리는 설탕공장으로 변해있다.

박용만선생은 대조선국민군단이 언젠가는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에서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미국편에 국민군단이 참전하게 되면 후에 조국독립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선생의 심중은 일본영사관이 남긴 기록에 나타나있다. 당시 호놀룰루소재 일본영사관은 박용만선생이 추진하는 군사학교설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군단 훈련생에게 접근해 박용만선생의 발언들을 수집했다.

일본영사관이 기록한 ‘박용만 선생이 훈련생들에게 말했다’는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국민군단 생도들이 평상시에도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언젠가 밀어닥칠 조국독립의 기회가 오면 일제히 평상시의 기량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은 언젠가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하와이는 일본에 대해 전략상 중요한 위치이고 언제든 유사시에 우리는 미국군인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인과 같은 황색인종이기 때문에 밀정역할이 용이하다. 따라서 평상시에 일본어를 익혀두고 일본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초창기 대조선국민군단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천 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국민군단에 들어오겠다고 찾아왔으나 100여명만 남았다. 농장일과 군사훈련을 같이 받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박용만선생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나간 가을부터 천여 명 사람이 그곳으로 가기를 생각하였으되 한 번와서 그 고생스러운 정형을 들으면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하는 가운데 오직 백여명 사람이 그 뒤를 따랐으니 대개 그들의 그렇게 뜻하는 것을 생각하면 박종수, 이치경 양씨나 기타 다른 동포들의 힘을 다하여 도움이 또한 괴이한 일이 아니로다”

얼마나 정확한 내용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일본영사관은 국민군단의 구성원과 초창기 운영실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병학교(兵學校)의 생도들 구성은 여러 가지다. 구한말 군인출신, 학생출신, 노동자 출신등이다. 노동자 출신중에서 불량생도들은 군인이 됐다고 난폭해져 영내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학생출신은 학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농장의 노동보다 학업에 열중한다고 한다. 교육기관의 설비가 미비해 도주하는 자가 적지 않은 상태다.

박용만선생을 도와 국민군단 운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문양목선생은 1914년 6월3일자 국민보에 국민군단 창설에 대한 해설을 아래와 같이 실었다. 문양목선생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가 1905년에 하와이노동자로 이민을 온 분이다. 1911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임됐고 다음해에는 신한민보 주필을 맡았었다.

“(前略) 몇 십년만 지나면 우리 민족에게는 무육이라 군략이라 하는 명사도 들어볼 수가 없을지니 본래 문약의 고질이 극도에 달하므로 말미암아 칼과 총의 그림자만 보고도 놀라고 겁이나서 항서를 써 바치고 독립을 잃고 자유를 빼앗기고 모든 권리를 이별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건장한 체격을 조성하여 용맹한 담력을 부어줄 자 누구인고, 이는 책임이 있는 인도자들이 사람마다 급무인 줄로 여겨 먼저 진행코자 하는 동일한 정견이니라…”

의지와 기상은 높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초창기 대조선국민군단은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츰 안정이 되면서 103명으로 시작한 국민군단의 훈련생은 311명까지 늘어났다. 미국정부는 자국내에서 외국인의 군사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하와이 군사령부는 조선의 특별한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군사학교 운영을 묵인해줬다. 그렇지만 총기 사용에는 난색을 표했다. 이런 탓에 훈련생들은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율은 엄격했다. 훈련생들은 오전 6시면 일어나 박용만선생이 작사한 ‘됴선국가’나 ‘국민군가’를 부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됴선국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여엿으고 아름답다 산놉고 물고흔 우리나라/산마다 독립긔상 물마다 자유사상/자유독립 거룩한 흙 오 나의 사랑
(2)보아라 아희들 큰 나라 빗 영광을 볼지어다/단군긔쟈 신셩 덕화 신라 고려 문명개화/어나 셰게 어 나라 다시 잇나
(3)동반도 대됴션 그 일흠 억만 년 변티마라/땅덩이 다 달도록 햇빗이 다 늙도록/해동반도 됴션국 그 일흠 항샹
(4)작혀라 아희들 두 번 없 그를 직힐지어다/동녁 셤 맑은 물 불녁들 풀은 풀/너희 말 변 먹이거던 자디 말라

대조선국민군단은 호놀룰루의 ‘알로하 카니발’같은 국경일이나 국민회창립기념일 등에 시가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군복을 입은 한인들이 위풍도 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에 미국인들은 물론 한인들도 탄성을 질렀다.

그렇지만 대조선국민군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의 압력과 파인애플 농사의 흉작 등이 겹쳐서 ‘국카할루 아히후마누 국민군단은 문을 1915년 문을 닫게 된다.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일본은 미정부에 압력을 넣어 하와이 한인들의 군사훈련을 중지토록 했다. 결국 당시 미 국무부장관 로버트 랜싱은 하와이 주지사 핑크햄에게 군사학교 운영중단을 지시했고 국민군단은 해체의 길을 걷게된다.

국민회 하와이 총회 대의원이었던 정두옥씨는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에 국민군단이 해체되던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국민군 사관학교도 시기에 피해가 되어서 더 진보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 학도들이 헤어질 때에 서로 붙들고 대성통곡으로 이산되었다. 그러고도 남아있는 학생이 수십 명이라 정두옥씨의 교섭으로 와이엘루아 사탕수수 농장으로 옮겨두었다가 다시 태병선씨가 카후쿠농장에 교섭하여 그곳으로 가서 있다가 차차 파산되고 말았다”

이후 박용만 선생은 남아있던 대조선국민군단원 상당수를 하와이군사령부와 교섭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박용만선생은 하와이에 머물면서 간도지역에 토지를 구입해 독립군의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계획을 추진해나갔다. 한인사회를 장악한 이승만과 갈등관계가 계속되면서 선생은 1919년 미육군 운송함 토마스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출발, 마닐라를 거쳐 러시아 블라보스톡에 도착한다.

▲ 한인들이 일했던 와이파우 사탕수수 농장자리.지금은 지역문화 공원이 들어서 있다.호놀룰루항이 인접해 있어 한인들이 많이 일했다.

 

▲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의 모습.한인들은 에와·모쿠레이아·와이아네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하다 나중에는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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