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지도자의 거처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박한 호치민 생가
‘1달러 나라’ 캄보디아…세계 최대 사원 앙코르와트 등 눈에 선해

<글=조수웅 광주예총 특별위원장 사진=송재운 한국사진작가협회 광주시부지회장>

 

▲ 하룽베이 Ti-Top 정상에서 본 300여개 섬들의 전경

광주예총 최규철 회장의 주선으로 국제문화교류협의회 초청을 받은 일행 8명은 지난 12일 새벽 4시 인천공항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미술, 건축, 사진, 서예, 문학, 언론, 교육, 문화 등 내로라는 예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터라 출발부터 자부심이 솟구쳤다.

5시간 비행 끝에, 2시간의 시차가 있는 하노이 공항에 안착했다. 시가지에 접어들자 신통방통한 교통 흐름이 우리와 다른 문화임을 실감케 한다. 오토바이 자전거 자동차가 뒤범벅이 되었는데도 교통사고 없이 교행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대부분의 도로는 차선이 없고 차를 비켜 앞지르기를 할라치면 역주행하기 일쑤다. 참으로 낯선 풍경이다. 참으로 다른 문화다.

13일, TV로 익숙한 하롱베이 문화 탐방에 나섰다. 세계 7대 절경 중의 하나로 표현되는, 용이 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뱉은 보석이 섬이 된, 끝을 알 수 없고 생김새를 짐작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300개의 섬들을 가지고 있는 하롱베이는 TV에서 흔히 본 그대로다. 다만 TV에서 못 본 석회동굴이 있었는데, 동굴 내부는 승솟, 하늘문, 용형석, 용좌, 폭포, 선녀탕 등이 볼만했고, 석순은 없고 종유석만 있는 것이 특이했다.

하롱베이 재래시장은 ‘누구는 배 터져 죽고 또 누구는 배고파 죽는다’는 신자유주의 속살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사회주의를 해 봤다는 여긴들 소시민의 삶에 별 수 있겠나 싶다.

14일, 버스를 타고 하노이로 되돌아갔다. 1070년에 완공된 공자사원과 1076년에 세워진 베트남 최초의 교육기관 국자감이 어우러져 있는, 하노이에 현존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호치민 문묘를 찾았다. 그리고 최고 지도자의 거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박한 호치민(1954∼1969)생가를 방문했다. 서민을 위한 정치, 검소한 생활, 사심이 생길까 봐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호치민을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왜 모를까? 하지만 베트남인들마저 그의 참뜻을 이어받지 못한다는 의구심이 발동했다. 그렇게 소시민들의 입장만을 생각했다는 호치민 문묘 앞에 두 병사를 부동자세로 계속 세워두는 처사야말로 비인간적이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이틀 동안의 베트남 문화탐방을 마치고 두 번째 방문국인 캄보디아행 vietjetair를 탔다. 입국에 필요한 서류라며 승무원이 내민 3장의 종이와 씨름하다보니 어느 새 씨엠립 공황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이런 가관이 없다. 공항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점입가경이다. 자기 나라에 찾아온 손님 대접이 말이 아니다. 입구에 선 공항직원은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왜 그런지 설명도 없다. 천신만고 끝에 들어선 입국심사장도 마찬가지다. 공항 공무원들은 대놓고 1달러를 달란다. 1달러를 내밀면 통과고 그렇지 않으면 하염없이 붙들어 놓는다. 세상천지에 이런 공무원이 있다니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캄보디아’ 대신 ‘1달러 나라’로 이름을 고쳐주었다.

15일, 아침 일찍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5.2㎞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이 사원은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지은 것으로 섬세함,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사원이란다. 밀림 속에 묻혀 있다가 1860년 프랑스 앙리무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로 등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쨌 건 TV를 통해 익히 봐온 터지만 막상 면전에 서니 입이 딱 벌어졌다. 많은 나라 관광객들이 시골 5일장이 서는 날처럼 분빈다. 천 년 전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이 많은 돌을 옮겨왔으며 무슨 수로 돌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말인가? 그 많은 돌들마다 새겨진 조각들! 돌과 돌을 잇고 쌓는 기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과학적인 조치! 무엇보다 37년 건설 기간 동안 내내 동원 되었을 노예들!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삶이란 뭔지 권력이란 뭔지 멍멍하기만 하다. 이 거대한 작업이 한 마디로 ‘용비어천가’라니 더욱 허망하다.

그에 비해 앙코르 톰의 유적군(바이욘 사원, 바푸온 사원, 코끼리 테라스, 피미아나까스, 레퍼왕 테라스)은 서민을 생각하여 서민의 애환을 그려보려 애쓴 사원이라니 더 친근하게 다가가진다. 커다란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앙코르 톰은 앙코르와트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앙코르 톰은 당시 100만 명 이상이 산 대도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사방으로 나 있는데 동쪽에만 승리와 죽움의 두 문 있어 모두 5개다. 남문을 통해 숲이 무성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이욘사가 나오고 근처에 바푸온사원,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왕궁터, 그리고 맞은편에는 코끼리테라스와 레퍼왕의 테라스가 있다.

타 프롬도 볼만하다. 쟈야바르만 7세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만든 사원이라는데 나무가 휘감은 모습은 TV에 자주 보던 모습 그대로다. 이 사원은 다른 사원과는 달리 복원하지 않고 유지 보존만 한다고 한다.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정글에 방치해두다 보니 나무들이 너무 자라서 이를 제거하면 사원이 무너지기 때문이란다. 어찌 보면 자연과 사원이 상생하는 모습이다.

이날은 점심시간마저도 감동이었다. ‘평양랭면집’은 냉면이 입맛에 딱 달라붙는 맛도 맛이지만 북한 여성들의 구성진 가락에 취하게 한 것이다. ‘찔래꽃’이며 ‘번지 없는 주막’, 그리고 ‘반갑습니다’와 ‘통일의 노래’는 찡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멋진 장구춤까지 곁들여 놓으니 피로가 쫙 풀린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린다는 자부심도 컸다.

오후에는 1,000년 전 앙코르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기적의 인공호수 서바라이를 찾았다. 그들은 그때 어떤 방법으로 이토록 큰 호수를 만들고 수로를 개척했을까? 앙코르와트만 신비한 것은 아니었다.

16일, 우리 버스는 톤레삽 호수로 달렸다. 연간 10억 톤의 어획량으로 캄보디아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이 호수는 가까이 가보니 쓰레기 천국이다. 그 뿐인가 배를 타고 깊숙이 들어 갈수록 호수 위의 비참한 사람들의 삶이 한 눈에 들어온다. 월남전을 피해 이곳에 스며든 국적 없는 영세민들이란다. 삶이란 뭔가? 이렇게도 살 수 있는가? 또 다시 철학자연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한국인들의 도움 흔적이 선상집 곳곳에 표나 있어 그나마 위안이다. 그래도 멩그루나무 숲 사이를 보트여행하면서 내내 그 처참한 삶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톨레삽 호수를 뒤로 20세기 캄보디아 아픔의 현장인 왓트마이로 갔다. 씨엠립의 작은 킬링필드, 동족상잔은 다시금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도대체 가진자의 횡포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1달러’의 나라라는 명명을 참 잘했음을 캄보디아를 빠져나오면서도 확인했다. 출국장에서도 1달러를 주지 않으면 여전히 붙잡아둔다. 캄보디아 공항 공무원의 일관성은 알아줄만 하다. 입국에서 출국까지 1달러의 공세는 철두철미하다. 1달러 나라 공무원답다.

17일 아침 8시쯤 인천공항으로 되돌아 왔다. 반팔로 다니던 ‘1달러 나라’에서 하룻밤 사이 오리털외투로 갈아입어야 하는 변신이었지만, 종일토록 비행기를 타야하는 유럽여행보다는 동남아여행은 덜 피곤하고 더 값지다는 생각이다. 문화교류도 더 절실한 공통분모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참으로 값진 여행이었다. 이런 보람을 맛보도록 멍석을 깔아준 국제문화교류협의회와 광주예총 최규철 회장께 다시 한 번 감사한다.

▲ 하룽베이 키스바위
▲ 톤레삽 호수에 있는 수상교회.
▲ 앙코르와트 기념사진
▲ 앙코르와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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