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창시 동학, 민심 얻어 방방곡곡 교세 키워
탄압받은 동학교도와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의 항쟁
1893년 3월 ‘보국안민’ 내걸고 4천명 무장에서 기포

 

▲ 무장기포 상상도1894년 3월 동학농민군 4천여명은 전북 무장현에서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기포했다. 동학농민군들은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는 한편 조선땅에서 일본의 세력을 물리칠것을 결의하며 일어섰다.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외세를 내세운 자주·자강·민족운동 이었다.그러나 아쉽게도 일제의 무력개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제공

동학은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됐다. 동학에는 유 · 불 · 선 등 여러 사상이 집약돼 있다. 최제우는 1861년 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동학포교에 나섰다. 당시 조선조정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었는데 동학을 천주교(西學)로 오인해 핍박했다.

최제우는 1861년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다가 다음해 3월 경주로 돌아갔다. 1862년 조정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최제우를 체포해 옥에 가둔다. 당시는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결백함을 주장하자 조정을 그를 풀어준다.

최제우가 체포됐다가 다시 풀려난 것은 전화위복의 결과를 가져왔다. 조정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이후로 동학이 급속히 번져갔다. 최제우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로 하여금 포교토록 하고 한편으로는 입도한 동학교도들을 관리토록 했다.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늘어나자 조선조정은 동학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운은 1861년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제 2대 교주로 삼았다. 최제우는 1863년 체포돼 다음해3월 세상을 어지럽혔다(邪道亂正)는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동학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事人如天)고 가르쳤다. 평등을 외치는 동학의 교리에 소외 되고 억압 받던 백성들이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당시로는 혁명적인 평등사상과 함께 동학은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는 사상이었다.

동학은 백성들에게 신분제도의 불평등함에 대해 눈을 뜨게끔 했다. 또 일본과 청나라의 군사침략에 대해서도 백성들이 경계심을 갖도록 했다. 동학은 1890년대 초에 이르러 그 교세가 매우 커졌다. 커진 세를 바탕으로 동학교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죄를 벗겨달라며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였다.

두 차례에 걸친 신원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교도들은 1893년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의 원평에서 각각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에서는 교조신원 청원 뿐만 아니라 탐관오리의 축출과 일본과 서양을 배척한다는 뜻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구호까지 등장했다.

한편 1894년 1월 고부민란(古阜民亂)이 일어났다. 고부민란은 군수 조병갑이 악랄한 수탈 때문에 비롯됐다. 그해 2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과 고부군아를 습격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혀있던 죄인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수탈한 수세미(水稅米)를 되돌려 주었다. 조정은 농민들의 기세에 놀라 조병갑을 체포해 의금부로 압송했다.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농민들을 회유했으나 결국에는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뤘다.

안핵사로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는 벽사 역졸 2,000 여명 중 800명을 고부로 이끌고 가 고부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민가를 불 지르고 남정네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아녀자들에 대한 강간도 이뤄졌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창의문을 발표했다. 이들 동학지도자들은 군사를 일으킨 이유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웠다.

전봉준이 동학군을 모으자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호응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가 돼 농민들의 투쟁을 이끌었다.

동학운동은 동학교도들이 교주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펼칠 때만 하더라도 정치적 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관리들의 수탈에 분노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킨 뒤 동학에 합류하면서 동학운동은 혁명의 성격으로 발전됐다.

동학은 백성 개개인들의 염원을 해결해주고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는 종교였다. 조정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백성들이 모여들면서 정치혁명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동학운동은 외세를 배격하려는 민족자주운동이었으며 또 사회를 바꾸려는 혁명이었다.

▲ 사발통문동학농민군들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적었다. 사발통문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 고부성을 격파해 군수 조병갑을 비롯한 악독한 향리들을 없애고 전주성을 함락시킨 뒤 한양으로 향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동학 창시자 최제우(좌),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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