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무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무안, 전남 서부지역 동학농민혁명·전투의 중심지

배상옥이라는 걸출한 지도자 밑에서 농민군 주력부대
전봉준 장군 1차 봉기 때 무안출신 지도자 가장 많아
백창석씨 중심으로 각종 사료 발굴 및 기록작업 활발
 

▲ 무안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의 생가 터 터 앞에 보이는 정면의 텃밭이 배상옥의 생기터 이다. 배상옥은 전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을 지휘했다. 전주화약 이후 청천재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고막교 전투에서 패배한 뒤 1894년 음력 12월 해남에서 체포돼 처형당했다.

 ■ 무안
무안은 전남 장흥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동학농민혁명사가 연구되고 있는 곳이다. 지난 2008년 무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및 희생자 후손들은 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창립하고 관련 자료 발굴 및 유적지 보존에 힘을 모으고 있다.

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 취지문

1894년 겨울 관군들의 눈을 피해 고막다리를 넘어 나주성으로 진입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정당한 사람대우를 받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나라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워 국가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해서 가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오직 한 마음 대동 세상을 꿈꾸며 죽창을 잡았습니다. 이제 그분들이 가신 지 114년, 그분들의 충심이 왜곡되지 않고 비적과 비도로 불리던 그분들의 명예만이라도 회복시키는 것이 후손된 자들의 바른 도리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선조들은 역도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눈을 감아야 했고, 유족들은 그 족쇄의 굴레 속에서 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땅의 역사교과서도 그날의 역사를 ‘동학란’ 또는 ‘동학 민란’으로 표기하여 오직 나라와 백성들의 삶을 걱정했던 그분들에게 참으로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죄를 짓고 살아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몰아세우던 일제와 군사독재시대는 지났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민의 이름으로 참여자와 그 유족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야 하며 명예회복을 위해 다 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배상옥 생가 옆 대나무 숲 자리에 들어서 주택. 목포시 대양동 지적로 56 맞은 편 텃밭이다.

이제 우리의 선조를 비롯한 동학군들은 이 땅의 역사요, 이 땅의 정신이요, 이 땅의 수호자가 되어 우리의 앞길에 북소리가 될 것이고, 분단된 한반도를 다시 잇는 평화통일의 횃불로 타오를 것입니다. 역사가 바로 서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 오랜 세월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외면해 왔던 우리 선조들의 족적을 찾아 잊혀진 역사를 되찾고 바로 세울 것을「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는 무안군민을 비롯한 동학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는 그동안 학계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기록중심의 연구였을 뿐 현장위주의 연구조사는 아니었다. 무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 전환점이 된 것은 지난 2004년부터 무안향토사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각 마을을 탐방하면서 후손들의 증언과 자료들을 수집하면서부터다.

무안향토사연구소에서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무안지역 386개 마을 중 180개 마을을 찾아가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와 증언들을 모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실시된 이 현장조사의 중심에는 역사교사인 백창석씨(현 무안군문화원장)가 자리하고 있다.

백씨와 박석면씨, 박금남씨, 전승철씨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실시된 현장조사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참가자가 남긴 기록이나 유물 등을 많이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많은 증언들과 일부 사료들을 확보할 수 있어서 갑오동학혁명의 상처와 처절함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데는 백창석 원장의 도움이 컸다. 백 원장은 무안지역 곳곳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안내하면서 유적지에 담겨진 역사적 사실과 사연들을 소개해주었다.

무안에 언제 동학이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1880년대 후반에 전남 서부지역인 영광과 함평 등에 동학이 전파됐고 남부지역인 장흥 · 보성· 완도 등에도 1890년대 초반에 이미 동학교세가 매우 컸다는 사실을 볼 때 무안지역에도 비슷한 시기에 동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 무안은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배상옥(裵相玉)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어 무안을 비롯한 서부지역 동학전투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동학농민군 지도자들 가운데 무안출신 지도자들이 매우 많다. 두령 급 지도자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동학교도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백창석 무안군 문화원장무안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동학농민혁명사가 비교적 잘 정리돼 있다. 백창석원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을 돌아다니며 각종 구전과 증언을 확보했다. 백원장이 배상옥대접주가 배를 타고 무안 해제를 오가던 창포만을 가르키고 있다. 창포만은 지금은 간척지로 변해버렸다.

1893년 2월 11일에 있었던 광화문 복합상소 당시 동학 지도자 40명 가운데에는 무안의 배규찬(裵奎贊)이 포함돼 있다. 배규찬은 배상옥(裵奎仁)의 동생이다. 천도교회사 초고에는 전봉준 장군이 제1차 무장봉기를 했을 때 참여했던 농민군 지도자가 기록돼 있는데 무안출신이 15명이다. 그 다음이 남원으로 14명이었다.

1894년 1월 전봉준은 고부농민들과 함께 일어나 조병갑의 학정을 징치했다. 관군의 토벌이 뒤따르자 잠시 몸을 피신했다가 3월20일에 다시 손화중, 김개남의 도움을 받아 무장에서 봉기, 고부를 점령한다.

전봉준 등 동학지도자들은 백산에 집결해 격문과 4대 강령을 발표하고 반봉건, 반외세를 위해 봉기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 때 제주도를 포함해 전라도 53개 고을에서 33개 지방의 동학농민군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백산대회 때 참여한 두령급 명단이 기록돼 있는데 무안지역 두령이 15명으로 가장 많다. 기록에 나와 있는 무안의 두령은 배규인, 배규찬, 송관호, 박기운, 정경택, 박연교, 노영학, 노윤하, 박인화, 송두옥, 김행노, 이민홍, 임춘경, 이동근, 김용문 등이다.
 

▲ 무안지역 집강소가 설치됐던 청전재배상옥은 청계면 청계리 달성 배씨 집성촌 청천재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주도했다.

무안 다음으로 동학지도자가 많았던 곳은 남원과 고부로, 각 13명씩이었다. 이 당시 전남지역 동학교도 두령 89명중 무안출신이 15명이나 됐다는 것은 무안지역의 동학교세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 대부분 두령 급은 1명이었고, 많아야 4~5명이었다.

보은집회 때도 전라도에서 온 200여명의 동학교도중 80명이 무안의 동학교도였다. 무안의동학농민군은 전봉군장군의 주력부대였다. <동학란기록><선봉진각읍요발관급감결>에는 많은 무안 농민들이 동학군에 가담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청천재 현판

“무안읍은 멀리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곳으로 교화와 은택을 입지 못하여 동학농민군이 창궐할 때 모두 가담하게 된 것을 요행으로 여겼고, 좋아하여 아주 혼란스럽고 약탈과 보복이 심했으며 평민으로 동학에 가담하지 않은 자는 아주 드문 형편이었다.”

백산에 모였던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영군을 황토현에서 격파한 뒤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차례로 점령한 뒤 영광에 입성해 4일을 머물렀다. 동학농민군은 영광을 떠나 함평에 도착, 이곳에서 7일 동안 주둔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