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녕성 함락과 여동학(女東學) 이소사(李召史)

(34)장녕성 함락과 여동학(女東學) 이소사(李召史)

여동학 이소사, 동학군 지휘하며 장녕성 공격

관군에게 체포된 후 나주 초토영에서 고문당한뒤 사망

관군진압기록 <우선봉일기>와 일본 신문기사에 등장

여성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존재…널리 알리고 기념해야
 

▲ 여동학 이소사 장녕성 전투 지휘도동학농민군들이 장녕성을 공격할 때 이소사라는 여인이 동학군 일부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대 초반의 이소사는 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후 관군들에게 체포돼 나주 초토영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아 숨졌다. 말을 타고 지휘하고 있는 여인이 이소사다. /조연희 화백 作

동학농민군은 장녕성을 함락시킨 후 박헌양부사를 참살한다. 그러나 박헌양 부사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총에 맞았는지, 칼에 찔렸는지, 아니면 맞아 죽었는지, 정확한 그의 사인(死因)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장녕성 전투에 참여한 이소사라는 여인이 박헌양부사를 칼로 베 죽였다고 주장하나 그 진위여부는 알 길이 없다.
 

▲ 조연희 화백

관군진압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흥 전투의 틈을 타서 부사를 죽인 것은 여자(이소사)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동학은 사실 미친 사람이었는데, 동학도들이 옹립해서 천사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다”

관군 측 기록이라 이소사라는 여인을 매우 폄훼하고 있다. 동학도들이 ‘미친 여자’를 박헌양부사를 죽인 ‘여전사’로 미화시켰다는 논조다. 관군 측 후손들은 박헌양부사가 여자가 휘두른 칼에 숨졌다는 추정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박헌양 부사의 고귀한 순절을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장녕성 전투에 참여한 이소사라는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일본군과 관군의 고문 끝에 숨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소사는 누구인가?

이소사에 대한 기록은 동학군 토벌기록인 우선봉일기(右先鋒日記)와 동학혁명 당시 일본에서 발행됐던 국민신문(國民新聞)과 조일신문(朝日新聞) 등에 남아있다. 소사(召史)라는 명칭은 본래 남편을 잃은 과부(寡婦)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그러나 이소사가 관군에 체포된 후 매에 맞아 온몸의 살이 문드러져 목숨이 거의 끊기자 관군이 남편(金良文)을 수소문해 간호하도록 시도했다는 기록을 참조해보면 과부가 아닌 사람에게도 소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갑오의 여인 이소사’ 책표지전남여성플라자가 지난해 펴낸 ‘갑오(甲午)의 여인, 이소사(李召史)’책 표지. 남도일보 최혁 주필이 원고를 썼다.

장흥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연구해온 위의환씨는 여동학 이소사의 존재를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린 문헌으로 정부의 토벌군이었던 이두황(李斗璜)의 우선봉일기를 꼽는다. 이두황이 1895년 1월 1일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거괴 체포자(이소사)를 나주로 호송이 가능하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성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에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을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이 받았습니다.
 

▲ 장흥부 지도1870년대 그려진 장흥지도. 당시 장흥성은 장녕성으로 불렸는데 동학농민군은 동문과 북문, 남문 3방향으로 성을 공격했다. 박헌양 부사는 장흥관아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장흥관아가 있던 자리는 현재 장원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장흥읍 장원길 12번지 일대이다. 1950년까지 장흥군청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후 주택지로 변했다.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돼 있었으며 교령을 받았을때에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 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두황은 마음을 바꿔 이소사를 당일 오후 나주로 압송시켜 조사를 받도록 한다. 이소사는 장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 몸이 심하게 망가졌는데 때문에 나주 일본군 진영에서는 조사를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이소사의 남편을 찾아 간호를 하도록 해 이소사의 몸이 어느 정도나아지면 조사를 하려 했으나 남편 김양문이 이소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또 이후의 이소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신문에 묘사된 이소사

1895년 일본에서 발행되던 국민신문과 조일신문에는 이소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서 이소사는 장흥부 전투를 할 때 말을 타고 동학군을 지휘했던 여전사로 소개되고 있다. 게다가 22살의 빼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으로 묘사하면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음은 이소사에 관한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자 신문기사.(천도교 장흥교구와 장흥군이 펴낸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총서 2권 중에서 발췌)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여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그러나 장흥전투의 패배로 관군에 체포돼 지금은 장흥의 철창 안에 있다고 한다”

또 조일신문 1895년 4월 7일자에는 아래와 같은 이소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장흥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는데 추천으로 수령이 됐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을 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됐다. 동학도가 귀신을 이야기하고 신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 혹은 천녀라 칭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했다”

송기숙교수는 ‘장흥지역 동학농민전쟁 관계구전조사’를 1990년 5월 남풍출판사에서 발행한 ‘역사와 현장’에 실으면서 이소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당시 일본 조일신문에 장흥에서 이소사란 여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짤막하게 보도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중략) 이가(李哥)라면 이방언장군의 집안 여자가 아닐까 싶으나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며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 것이다”

■이소사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

1975년 4월 발간된 장흥군향토지는 동학과 관련된 글에서 이소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소사란 여인이 앞장서서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당시 일본의 조일신문에 기록돼 있으나 여타 동학관계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확인된다면 3.1일 운동 때의 유관순처럼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부상될 것이다”

말을 타고 동학군을 지휘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더 이상의 자료가 없기에 이소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소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위의환씨는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인환대흥대접주와 이소사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위씨는 이 근거로 ‘우선봉일기 박헌양부사의 순절편’에서 이소사의 거처가 장흥부에서 40리라는 지적을 들고 있다.

위씨는 이소사가 이인환대접주와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면 동학군이 장녕성(장흥)을 함락시킬 때 수성군을 상대로 싸움을 같이 치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남소사랑이 쓴 토벌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 중에는 “부사의 목을 내친 사람이 여동학(이소사)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대목이 있어서이다.

남소사랑이 모진 고문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이소사를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치료를 하게하고 또 장흥에서 남편 김양문을 찾아 나주로 보내라고 지시한 것은 어떻게라도 이소사를 소생시켜 그녀가 직접 부사를 죽였는지, 그리고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부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직접 조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위의환씨의 생각이다.

이런 모든 측면을 감안해 볼 때 여성인 이소사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항일운동에 있어서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다. 이소사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지만 후학들의 끊이지 않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와 자료조사가 있을 때 언젠가는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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