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병영성을 지키다 장렬히 숨진 관군들

(39)병영성을 지키다 장렬히 숨진 관군들

병영성 지키다 장렬히 숨진 일부 관군, 참군인 표상 삼아야

감관(監官) 김두흡, 탈취막으려 화약고에 불씨안고 뛰어들어 산화

우후(虞侯) 정규찬과 도정(都正) 박창현, 끝까지 맞서 싸우다 순국
 

홍교에서 바라본 병영성
사진중앙에 병영성이 보인다. 병영성 건너편에 있는 산들이 농민군들이 병영성을 공격할때 올랐던 옥녀봉과 성자산, 성락산이다.

박기현의 <일사> 12월 10일조에는 “아침 후에 적이 본영(本營: 병영)을 함락하고 관사와 민가에 방화를 하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학군이 병영성을 공격할 때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농민군이 병영성으로 쳐들어오자 서병무 병사는 영암으로 도망갔다. 병사가 도망가자 사기가 떨어진 수성군들은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패색이 완연한 가운데 일부 관군들은 목숨을 다 바쳐 병영성을 사수하려 했다. 용기있고 진정한 군인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 <우선봉일기> 1월 5일조 병영성의 보고에는 “지난 12월 초 10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1시) 경 동학도가 들어와 본영을 함락시킬 때 우후(虞侯) 정규찬(鄭逵贊)은 손자와 함께 총탄에 맞아 서거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병영성골목
병영의 마을에서는 옛 병영의 흔적을 쉽게 더듬을 수 있다. 좁은 골목길과 낮은 담장에서 과거 병영의 모습을 헤아릴수 있다. 탐방객들이 강진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병영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승정원일기>에 12월 27일조 의하면 정규찬은 나중에 장흥부사 박헌양과 함께 조정에서 휼전을 베풀 것이 논의되어 특별히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로 추증됐다.

특히 성이 함락될 지경에 놓이자 군기 창고를 지키고 있던 감군 김두흡은 불씨를 껴안고 화약창고로 뛰어들었다. 동학농민군들은 회령진에서 탈취한 화약과 대포로 장녕성과 병영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만약 병영성에서 다량의 화약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농민군들은 보강된 화력으로 나주성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군사 김두흡의 의로운 순절로 화약을 보충할 길이 막히자 농민군은 나주로의 진격을 포기했다.

기자는 병영성 함락당시 군사 김두흡이 보인 장렬한 산화에 대해 ‘갑오의 여인 이소사’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농민군들은 장흥과 강진, 보성 경계에 나누어 진을 쳤다. 수 천 명의 농민군들이 벌판을 뒤덮고 있는 모습에 병영성 군졸들은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수성군은 성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나름대로 방비를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병영성은 벌판 한 가운데 있어서 수비를 하기가 매우 어려운 성이었다. 대포에 맞아 석축이 무너지면 적들을 막아낼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 성안에 있는 수성군이 1천여명이기는 하나 동학군의 수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수였다.

병영성 공격은 10일 오전 11시쯤 시작됐다. 수성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우후(虞侯) 정규찬과 도정(都正) 출신 박창현, 감관(監官) 김두흡 등 관군의 지휘자들이 용맹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군이 대포를 쏘아 성문을 깨부수자 전세는 확 기울어져 버렸다.

농민군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군사를 지휘하던 병사 서병무(徐丙懋)는 패랭이를 쓰고 성을 빠져나왔다. 백성들 틈에 끼어 영암으로 도망갔다. 이와는 달리 군기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던 김두흡은 농민군이 몰려오자 서둘러 화약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김두흡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많은 화약을 동학패거리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화약창고를 폭파시켜야한다고 생각했다. 동학군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만 했다.
 

병영성벽의 기자

급하게 뛰어가느라 횃불 일부가 얼굴과 손에 튀어 살이 타들어갔다. 그러나 김두흡은 아픈 것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잠시 뒤면 이 세상을 하직할 몸,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저기~ 저기! 저놈 막아라”

다급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소사는 병영성을 지키던 한 군사가 횃불을 들고 화약창고로 뛰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농민군이 얼른 시위를 먹여 활을 쏘았으나 군졸을 맞추지 못했다.

농민군이 칼을 들고 화약창고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두흡이 스무 발자국 정도 앞서 있었다. 군졸이 화약창고로 들어가는 것을 본 순간, 농민군은 아차 글렀구나 하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뒤돌아서 한 발을 떼는 순간 수 만 개의 벼락천둥이 한꺼번에 내려치는 것 같은 굉음이 병영성을 울렸다.

시뻘건 불길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치솟았다. 굉음에 놀라 농민군과수성군 상당수가 기절을 했다. 화약창고 곁에 있던 100여 명의 농민군과 수성군이 목숨을 잃었다”

관군기록에는 화약창고 폭발로 9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돼 있다. 소설에서는 사망자의 수가 과장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병영성을 지키던 서병무 병사가 도망간 와중에도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던 군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김두흡 감군의 순절은 부하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강재구 소령과 비견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후손들은 김두흡 감군의 순절과 애국심은 귀감으로 삼질 않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최근 들어 외세 배격과 폐정개혁이라는 동학농민군의 자주정신과 개혁정신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당연한 평가이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농민군 측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해서 순절한 관군 측 인사들을 과소 평가하거나 기념사업을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것은 시정돼야 한다고 믿는다.

후손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의의를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시급한 일이기는 하나 관리로서, 군사로서 목숨을 바쳐 의연하게 순국한 박헌양 부사와 여러 군사들의 용기있는 행동 또한 우리 후손들이 본받아야할 자세이자 애국정신이다.

■병영성의 재산피해

병영성의 피해는 규장각 소장(문서번호: 17247)의 첩보존안(捷報存案) 1895년 3월 23일조에 “전라도 병영의 첩보에 의하면 본영(병영)이 불에 타 공해 284간(間)을 부득불급 개건(改建)하려 하는데, 물력(物力)을 갖추기 어려운 바, 소용되는 비용을 마땅히 계획해 달라는 일”이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병영성 건물 284간이 불에 탔다는 것이다. 병영성의 민가(民家)도 이때 상당한 재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일사> 12월 12일조에는 “병영의 민가 가운데 불탄 것이 열에 여덟아홉이나 됐다”고 기록돼 있다.
 

병영성 옆에 자리한 홍교
병영성 홍교는 1730년에 만들어졌다.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몇개 되지 않은 무지개 다리다. 배진강 저수지의 연꽃과 어울려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강진 병영성 홍교

배진천 가로지르는 무지개 다리

세월의 깊이 간직한 아담한 자태

병영성 옆에는 홍교(虹橋)가 있다. 병영성 뒤쪽으로 흐르는 배진천위에 놓여진 관계로 배진강다리라고도 불린다. 직사각형 화강석재 74개를 서로 짜 맞추어 무지개(홍예)꼴로 만들었다. 빈틈은 잡석으로 채운 뒤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길이가 7m여서 크지 않은 관계로 아담한 느낌을 준다. 세월의 이끼가 낀 창연함과 아기자기한 맛이 어우러져 있어 시선을 붙잡는다. 배진강 저수지의 연꽃과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저 멀리 병영성과 탁 트인 벌판, 옥녀봉의 경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눈이 즐겁다.

홍교의 상단 중앙에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용 한마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병영성 홍교는 1730년에 만들어졌다 한다. 유한계 정승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해 양한조의 감독 아래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아름다운 다리지만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이 다리 주변에서도 많은 피가 뿌려졌을 것이다. 병영성 안은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홍교는 병영성을 비켜선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돌다리라 화를 면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병무 병사

서병무 병사는 11월 28일 장흥에 구원병을 보내기는 했으나 군사가 29일 병영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장흥부사의 구원요청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인환 선생은 서병무 병사가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이인환 농민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농민군이 회령진성에서 육군보다 화력이 더 월등한 수군의 대포를 확보했기 장녕성에 원군을 보낸다하더라도 수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수만명의 농민군이 대포를 앞세워 병영성을 공격할 때 쉽사리 병력을 움직였다가가 병영성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이유로 서 병사는 장녕성이 함락된 후 나주 초토영과 이규태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병영과의 거리가 10여 리에 불과합니다. [동학농민군의] 흉특한 큰 소리가 낭자하게 전해져 동에서 공격할 듯하다가 서쪽을 공격하여 과연 예측하기가 어려움에 미약한 군사로는 방어할 계책이 없어 위급한 화가 급박하게 닥쳐오니 어찌 급하게 보고하지 않겠습니까?”애걸했다.

서 병사는 외부로 구원만 요청하면서 내부의 우후(虞侯) 정규찬 등이 건의한 선제공격 등을 거부하고 목숨을 구할 방도만 궁리했다. 성곽주변에 목책을 두르며 수성준비를 하기는 했으나 농민군이 병영성으로 쳐들어오자 영암으로 도망을 간 다음 12월 16일에야 영암에서 병영으로 돌아왔다.

동학군 진압후 서병사는 애초에 [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월봉(越俸) 3등(等)의 벌전을 당한다. <일사> 12월 29일조에는 “어제 일본군 대장이 나주에서 사람을 시켜 병사를 부르니 병사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곧 자결코자 했으나 이교(吏校)들이 설득해 오늘 아침 나주로 갔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다음해인 을미년 1월 10일 나주에서 병영으로 돌아왔는데 후비보병 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은 <동학당정토약기>에서 “강진 병사(兵使)의 그 거동이 좀 이상해 그를 나주성으로 소환하여 규문하였다. 그가 그의 관내를 진무(鎭撫)하지 않은 것은 오직 그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때문이었으며 다른 이유가 없었다. 4~5일 체제시켰다가 방면했다”고 서병무 병사의 상태에 대해 썼다. 일본군의 문책에서 살아 남기위해 정신착란증 모습을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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