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나주 성 공격 포기하고 장흥으로 회군
(41)장흥으로 철수한 동학농민군
농민군 나주 성 공격 포기하고 장흥으로 회군
‘일본군 나주입성·전봉준 체포·화약부족’ 등 이유
日軍 지휘 조일(朝日)연합군 네 방향에서 장흥진격
농민군은 주요 고개·길목 지키며 일본군 공격 대비
장흥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12월 초 관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다. 12월 4일 벽사역 함락, 5일 장흥부 함락, 7일 강진현 함락, 10일 병영성 함락까지 연승을 거듭한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동학농민군이 4개의 관아를 잇따라 깨부순 소식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 한 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농민군들에게는 벅찬 희망이었다.
자연히 남도 일대의 동학농민군 상당수가 장흥으로 몰려들었다. 농민군은 벽사역과 장흥도호부, 강진현, 병영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이후 나주성으로 진격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를 않았다. 가장 나빴던 것은 전봉준이 체포된 것이다. 또 12월 1일부터 7일 사이 김개남을 비롯해 광주의 최경선·손화중, 순천 영호대도소의 김인배 등 핵심 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게다가 병영성을 함락시켰지만 대포를 쏠 수 있는 화약을 확보하는데도 실패했다. 병영성을 지키던 감군 김두흡이 화약이 농민군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을 안고 뛰어 들어가 화약고를 폭파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 제19대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부대가 12월 10일 나주에 도착한 것도 농민군이 나주공격을 포기하게 만든 이유였다.
당시 일본군은 전주(11/24)~임실(12/1)~남원(12/3)~순창(12/5)~광주(12/8)를 거쳐 나주에 들어왔다. 일본군과 함께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과 이진호가 지휘하는 교도중대 등 관군도 함께 나주에 도착했다. 이두황이 이끄는 우선봉진은 임실(12/1)~남원(12/2)~순창(12/5)~곡성(12/7)~구례(12/9)를 경유한 뒤 순천·광양·보성을 거쳐 나주에서 일본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장흥의 사학자 위의환 선생은 장흥동학농민군이 나주로 진격하지 않고 장흥으로 회군하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는 12월 2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돼 7일 최경선과 함께 일본군에 인계된 사실이다.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 이방언 장군은 이인환·구교철과 함께 기포를 할 때는 전봉준 장군과 협력해 나주성을 공략할 숙계(宿計)를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전봉준장군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주로 향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12월 12일 장흥으로 회군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11월 25일 대흥면에서 출정기포 후 회진의 회령진성에서 많은 무기를 대량으로 확보했던 농민군은 병영성에서도 그러한 군수품을 획득할 것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두흡이 화약고를 불 지르며 자폭하는 바람에 화약획득에 실패했다. 농민군은 대포를 많이 획득했지만 막상 대포를 쏠 수 있는 화약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나주성을 공략하기에는 화력이 열세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조일(朝日)연합군을 상대로 요새가 없는 벌판인 나주에서 싸운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무리였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경군과 함께 나주로 입성한 상태에서 전봉준과 최경선 부대의 지원없이 나주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곧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흥부를 사수하면서 필사(必死)의 항전을 펼치는 것이 최선책이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동학당정토약기>에는 나주공격을 포기하고 장흥으로 돌아간 동학농민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학도가)나주를 함락시킬 생각으로 좌측은 영광과 함평 방향으로부터, 중앙은 광주로부터, 우측은 능주 방향으로부터 나주를 포위할 목표를 세웠다. (동학도의) 각 부대는 1월 5일(음력 1894년 12월 10일)을 기해 나주를 함락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3일 전, 적도는 영암 방향으로 퇴각한 것 같다”
장흥의 현지기록인 <박후의적>과 <영회단>, <임태희추기>에는 병영에 있던 농민군이 모두 12월 12일 장흥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농민군은 장흥으로 돌아와 장흥 남문 밖과 건산 모정(茅亭嶝), 유치면 조양촌(현 유치면 소재지), 부산면 유앵동(유량리), 용산면 어산리 등지에 진을 쳤다. 동시에 조일연합군이 진격해 올 주요 길목에 농민군을 배치하고 전투준비를 했다.
한편 일본군이 지휘하는 조일(朝日)연합군은 강진 병영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강진으로 향했다. 12월11일 일본군 제19대대 미나미 대장은 일본군과 관군을 크게 4개부대로 나눠 강진으로 출발시켰다. 4개 부대 중 한 부대는 영암~강진, 또 한 부대는 보성~장흥~강진, 다른 부대는 나주 원정(元亭)~장흥 ~강진, 이규태 선봉진은 무안~목포~해남 길을 이용해 진격했다. 이 부대들은 농민군이 장흥으로 물러갔다는 소식에 공격목표를 강진에서 장흥으로 바꿨다.
위 선생은 나주지역에서 장흥으로 투입된 조일연합군의 총 병력수를 8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본군 550명과 경군 240명, 그리고 소대장 이상 간부를 포함할 경우 전투병력만 800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원부대인 근수(시중드는 하인)와 호곡대(號曲隊), 후병(候兵), 장부(長夫), 사후(伺候), 화병(火兵)과 마부(馬夫)와 소모관 백낙중의 부대 등을 포함하면 나주지역에서 장흥으로 투입된 조일연합군의 수는 1천 여 명을 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장흥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의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 부대 외에도 부산수비대영목안민(鈴木安民) 중대장이 지휘하는 부산수비대를 후발부대로 파견했다. 장흥에서 보성방면으로 도주하는 농민군을 토벌하면서 장흥으로 진격토록 했다. 또 일본 함선 축파함(筑派艦)과 조강함(操江艦)을 장흥 일대 남해안으로 보내 섬으로 빠져나가는 농민군을 토벌토록 했다.
장흥에 모여 있는 동학농민군을 네 방향에서 공격해 섬멸하고 보성과 해안으로 도망가는 농민군들을 철저히 소탕한다는 작전내용이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해안가로 몰아간 다음 씨를 말리지 않고 소탕한다는 ‘토끼몰이 작전’을 세워둔 상태였다. /kjhyuckcho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