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동학농민군, 장흥에 진을 치다

(42) 동학농민군, 장흥에 진을 치다

농민군, 장흥 주요 지점·길목 지키며 일본·관군 공격대비

병영에서 회군 후 남문·모정등·조양촌·유앵동·어산리에 주둔

1500여명 조일연합군 세 방향에서 장흥 진격…12일 첫 전투

日군 우세한 화력으로 모정등·유앵동·남문에서 수십 명 사살
 

장흥전경
장흥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대비해 장흥의 주요 언덕과 길목에 농민군을 배치했다. 우측 빨간색 실선이 동학군 주병력이 주둔했던 건산(모정등)이다. 중앙의 실선은 보성으로 넘어가는 곰치재다. 농민군은 보성 쪽에서 넘어오는 조일연합군을 막기 위해 곰치재를 지켰다. 좌측 실선이 벽사역터다. 장흥에는 12일부터 조일연합군이 들어와 모정과 남산 등 곳곳에서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남성진 수습기자 nam@namdonews.com
장흥 남산 전투지
일본군이 13일 동틀 녘 농민군과 전투를 벌인 남산(남외리). 장흥사학자 양기수씨가 남산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일연합군이 진입해온 장흥 관아 일대
일본군 제 19대대 3중대는 13일 새벽 장흥에 들어온다. 사진은 중앙 장흥경찰서 뒤쪽의 장원아파트와 정자 일대가 당시 관아 터였다. 일본군은 장흥관아 일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뒤 남산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12월 10일 강진 병영성을 함락시킨 뒤 장흥으로 돌아왔다. 농민군들은 장흥 남문 밖과 건산리 뒷산 모정등(茅亭嶝:지금의 장흥고등학교 뒷산) 일대에 주둔했다. 보성에서 들어올 관군과 일군(朝日聯合軍)을 막기 위해 장흥·보성 경계인 곰치에도 진을 쳤다. 장흥으로 집결한 농민군은 성벽이 허물어지고 민가가 불타버린 장녕 성 안쪽에 있지 않고 성 밖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장흥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학자 위의환씨는 여러 문헌을 참조해 농민군이 진을 쳤던 곳을 장흥읍 남문 밖(남외리)과 모정등(건산리), 유치면 조양촌((朝陽村:현 유치면 소재지), 부산면 유앵동(有鶯洞: 현 유량리), 용산면 어산리 등으로 지목하고 있다. 강진농민군 일부도 강진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주에 있던 조일연합군은 미나미(南小四郞)대대장의 지휘에 따라 세 길로 장흥으로 진입한다. 일본군 제19대 1중대(좌측지대)는 능주(綾州)에 진을 치고 장흥에 집결한 농민군 토벌에 나선다. 1중대는 강원도 일대와 거창, 함양, 운봉, 남원 등지에서 토벌을 하였기 때문에 산악전에 매우 강한 부대였다.

일제가 전투경험이 많고 산악전에 강한 부대를 능주로 배치한 것은 농민군을 철저히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장흥읍을 공격하는 한편 능주방면으로 연결되는 산길을 지키고 있다가 탈출하는 농민군을 토벌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 1중대는 장흥전투에서 최대의 전공을 올리고 있다.

우측지대인 2중대는 15일에야 장흥으로 들어온다. 2중대는 12일 병영에 도착한 뒤 농민군을 쫓아 13일에는 영암에서, 14일에는 강진에서 전투를 벌인다. 3중대(중로지대)는 12일 영암에서 농민군과 전투를 치른 뒤 그 뒤에 장흥으로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3중대는 조양촌 전투를 치른 부대로 추정되고 있다.

장흥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의 정확한 규모를 헤아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위의환씨는 여러 기록들을 분석한 뒤 14일 이전 장흥 쪽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55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5일 이후 장흥에 도착한 2중대 병력을 포함할 경우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장흥 전투에 동원된 경군(京軍)은 900여명에 달했다. 관군은 미나미(南小四郞)대대장의 지휘를 받았는데 이규태의 좌선봉진 414명을 비롯 교도중대 328명, 장위영 230명 등 모두 972명이었다. 이규태는 벽사역 찰방이었던 김일원을 앞세우고 12일 강진 병영에 도착한 뒤 곧바로 장흥으로 진격한다.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간의 최초 전투는 12일 아침 조양촌에서 벌어진다, 조양촌 전투에서는 농민군이 일본군을 급습해 타격을 입히기는 하나, 결국 일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주한다. 이후 12일 저녁에 건산전투가, 13일 새벽에는 남산(남외리) 전투가 벌어졌다. 이 두 전투에서 20여 명의 농민군이 목숨을 잃는다.

13일 남외리 전투가 끝난 뒤 유앵동에서 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이 다시 맞붙기도 했다. 일본군진압기록에는 ‘장흥부의 북방 약 2리(20리)의 지점에서 싸워 크게 이를 격파해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있다. 관군기록에 ‘북방 약 2리’지점은 유앵동(有鶯洞)으로 등장한다.

장흥의 사학자 양기수씨의 조사결과 전투가 벌어졌던 유앵동은 부산면 유량리(有良里)로 밝혀졌다. 위의환씨도 촌로(村老)들의 증언을 통해 일군의 진압기록에 등장하는 유앵동이 유량리임을 확인했다.

부산면은 이사경 접주의 동학세가 매우 큰 곳이었다.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표현에서 농민군들의 피해가 무척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식무기로 중무장한 60여명의 일본군이 투입된 전투였기에 농민군들의 희생이 그만큼 컸을 것으로 보인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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