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당한 일본군 조양촌 종가집에 불지르고 화풀이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동학유적지-(44. 조양촌전투<下>)

기습당한 일본군 조양촌 종가집에 불지르고 화풀이

동학세 컸던 마을, 인근 절터골에는 동학농민군 훈련장, 무기 제작소 있었던 듯

관군, 동학농민군 색출위해 마을 앞 정자나무에 아녀자 매달아놓고 고문하기도

희생자 많았으나 역도취급에 희생사실 쉬쉬…공식확인된 사망자는 몇명에 불과
 

하늘에서 바라본 조양마을
일본군 제 19대대 3중대와 관군 교도중대는 장흥으로 진격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장흥 유치면 조양촌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어수선한 틈을 타 동학농민군이 이 조일연합군을 습격해 피해를 입혔다. 조양촌 전투는 장흥농민군과 조일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다. 드론촬영/마동욱사진작가 제공

<유치면지>에 실려 있는 동학관련 구전기록은 아래와 같다.

▲<유치면지> 119~120쪽의 유치면의 동학농민군 활동:유치면에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활동이 있었음이 병영에서 살았던 유생 박기현의 <일사>라는 일기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동학군들의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끼었다고만 기록돼 있을 뿐 구체적인 활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또 1992년 목포대 인류학과 학생들이 채집한 구전에서 조양 1구 절터골이 동학군의 훈련장이었고, 김생규씨가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나왔으나 동학농민군의 결말이 실패로 돌아가서인지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위의환 선생은 조양촌 일대는 유치면과 이웃한 부산 용반리 출신 이사경 접주가 활약한 무대였던만큼 동학군과 조일연합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치밀한 연구와 조사가 진행됐더라면 더 많은 동학농민군 활동상을 발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동학농민군 최후항전인 석대들 전투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사람의 명단이 <장흥군향토지>에 나오는데 이 가운데 2명이 유치면 출신이다. 문찬필(文贊弼)은 유치면 수덕리 출신으로 1895년 1월 24일 45세 나이로 처형당했으나 처형 장소는 불분명하다. 문치화(文致化: 혹 문치원(文致元)이라고도 함)는 늑용리 출신으로 역시 1895년 1월 24일 39세의 나이로 벽사역에서 처형당했다.

문찬필과 문치화(원)는 형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최현식씨의 <갑오동학혁명사>에는 1976년 간행된 <장흥군향토지>의 기록을 인용해 석대혈전 희생자 명단에 김영서(金永瑞: 46세)와 고영의(高榮義: 45세)를 유치 수덕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1990년 간행된 <장흥군지>에서는 관산 출신으로 적고 있다. 각각 1894년 10월 26일, 12월 26일 벽사역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장흥동학농민혁명사, 천도교월회보)
 

가까운 곳에서 본 조양마을
조양마을 위쪽은 산세가 깊은 곳이다. 그런 지형 탓에 2006년에 장흥다목적댐이 들어섰다. 댐이 들어선 계곡 일대를 거쳐 일본군이 이동해온 것으로 보인다. 나주 세지면 동창을 넘으면 영암군 금정면이고 이곳을 넘으면 바로 유치면 조양리와 신풍리다.

또 <천도교월회보>에는 문남택(文南澤)이 유치출신의 대접주로서 1891년에 동학에 입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인적사항이나 활약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처럼 유치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접주로서 또는 농민군으로 참여해 처형까지 당한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농민군들의 희생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세가 컸던만큼 석대들 전투에서 희생당한 농민들도 많았을 것이다.

한편 유치면과 부산면을 잇는 빈재(貧峙)는 작은 고개이긴 하지만 1894년 10월 이래 장흥부의 외곽지대인 흑석장터(장평면 봉림리 흑석마을) 사창(司倉) 등지에서 군세를 강화하던 농민군이 12월초 장흥부를 공격하기 위해 진출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고개는 농민군의 주둔지인 흑석장터와 농민군의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자라번지(부산면 용반리~금자리 앞들)를 이어주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농민군의 출입이 잦았던 고개였음이 분명하다.
 

조양마을앞의 큰 나무
갑오항쟁을 진압한 후 관군은 조양촌의 동학농민군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마을에는 관군들이 동학군을 체포하기 위해 마을 정자앞의 나무에 아녀자를 매달고 고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마도 지금 마을 정자앞에 있는 이 나무가 아닌듯싶다.

▲<유치면지> 580~581쪽의 조양1구 마을의 중요사건:동학농민혁명 때에 이곳 마을에 거주하였던 경주 김씨 김생규(생몰년 미상, 그의 후손이 반월마을에 거주한다고 함)가 동학대장(?)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관군이 김생규의 소재를 찾으려고 그의 부인을 붙잡아 마을 앞 정자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했으나 부인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지금의 절터골에 동학군 훈련장이 설치돼 이곳에서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그 규모나 마을에서 참여한 인물들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유치면지> 591쪽 조양2구 마을의 중요사건: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본 마을에서 총기·탄약 등을 제조하여 지원하였음.
 

장흥사학자 위의환씨
위의환 선생이 지난 19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장흥동학전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위 선생은 각종 기록을 참조해 조양촌 전투가 농민군과 조일연합군 사이의 최초전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치면지> 611쪽 신풍1구 마을의 중요사건: 갑오동학농민혁명시 의병들이 일본수비대와 경군에게 화승총을 들고 대항했으나, 역부족인지라 문씨 종가집 주변의 산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대가 종가집에서 조식을 하던 중에 기습하여 일본군대의 조총을 빼앗아서 많이 물리쳤으나, 일본군이 홧김에 종갓집을 태워버렸다.

위 선생은 <유치면지>에서 채집한 구전 중 조양1구의 “지금의 절터골에 동학군 훈련장이 설치되어 이곳에서 훈련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규모나 이 마을에서 동학군이 참가했던 인물들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다”와 조양2구의 “동학농민혁명 때 본 마을에서 총기·탄약 등을 제조하여 지원하였음”이라는 증언에 따라 유치면의 동학의 근거지가 조양촌 일대라고 간주하고 있다.

위 선생은 특히 <유치면지> 611쪽 신풍1구의 동학기록 중 ‘의병들이 일본수비대와 경군에게 화승총을 들고 대항했으나, 역부족인지라 문씨 종갓집 주변의 산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대가 종갓집에서 조식을 하던 중에 기습하여 일본군대의 조총을 빼앗아서 많이 물리쳤다’라는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동학군의 일본군을 물리치려는 기개가 매우 높았으며 농민군의 병력 또한 상당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증언에 따르면 농민군은 조양촌 일대에서 벌어진 조일연합군과의 최초 접전에서는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어 아침 식사 중이던 조일연합군을 기습 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힌 것이다.
 

마동욱 사진작가
마동욱씨는 장흥을 중심으로 한 농촌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사진작가이다.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농민들의 진솔한 삶을 담아내고 있다.

앞서 밝힌 대로 조양촌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일본군이 피해를 입었기에 조양촌과 유치 일대 동학농민군에 대한 소탕과 살육은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동학군의 피해상황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 또한 남아있지 않다. 이는 ‘동학란’뒤에 관군의 보복을 두려워해 농민군 가족들이 몸을 숨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kjhyuckchoi@hanmail.net

또 ‘역도의 가족’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갑오항쟁에 뛰어들었다가 숨진 동학도와 농민들의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조상들을 호적 등 문중기록에서 빼버린 것도 농민군 희생자수를 가늠하기 힘든 이유다. 이런 이유로 위의환씨가 보유하고 있는 장흥동학농민군 인명 데이터베이스 515명 중 유치면 농민군은 단 8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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