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장흥 벌판이 피로 물들기 시작하다)

(45. 장흥 벌판이 피로 물들기 시작하다)

일본군 막강 화력에 밀려 죽창든 농민군 곳곳에서 큰 피해

모정등에 진치고 있던 동학군 수백명 일본군 공격에 20여명 사망

남산 동학군, 대나무밭 유인 매복작전에 걸려 수십여명 목숨잃어

유앵동 이사경농민군 큰 피해…일본군보고서 “시체가 산을 이뤘다”
 

모정등 모습
수십년전에 촬영된 장흥 건산 모정등 전경. 눈이 내려있는 모습이다. 1894년 12월 당시에도 눈이 내려있었다면 사진과 같은 분위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사진이다.
남산에서 촬영한 모정등 모습./남성진 수습기자 nam@namdonews.com

■모정등 전투=12일 저녁 건산리(모정등)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한다. 이 전투에 투입된 부대는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19대대 본부 소속 병력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부대는 장흥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장흥에 들어오자마자 건산의 농민군과 일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위의환씨는 일본군 진압기록인 <19대대 숙박표> 12일字에 기록돼 있는 ‘支乾山(本營內戰)’은 백목성태랑 부대가 치른 전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백목성태랑은 본래 후비보병 18대대 소속이나 10월 13일 19대대로 배속돼 3중대와 함께 중로(中路) 분진대를 담당했다. 때문에 남소사랑(南小四郞)이 본영(本營: 곧 대대본부)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모정등 전투와 관련해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통위영 황수옥의 보고내용에 따르면) 13일 동트기 전에 적들의 형편을 탐지하니 본부의 남문 밖에 적도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하므로 일본 병사와 본 진영의 병사 30명이 힘을 합해 진격하니 수합에 미치지 않아 적도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기는 틈을 타서 추격하여 총살한 자가 20여 명이며 나머지 무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아나서 끝내 드러난 흔적이 없습니다”

모정등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의 수가 몇명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최소한 수백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수백의 농민군은 30여명에 불과한 조일연합군의 공격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장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산모습
장흥문화예술회관이 들어서기 전의 남산일대의 전경이다. 가옥들 앞으로 보이는 대나무 숲이 일본군이 매복해 있던 곳이다. 왼쪽이 석대이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사진이다.
남산에서 대나무 숲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남성진 수습기자 nam@namdonews.com

■남산전투=동학농민군은 10일 강진 병영성을 함락시킨 뒤 장흥으로 돌아왔다. 상당수 농민군들을 장흥 남문 밖과 모정 뒷산에서 주둔했다. 장흥부성은 장흥부를 지키기 위한 부성(府城)이다. 예부터 장녕성으로 불려 왔다.

지금의 남외리와 장흥경찰서 일대를 빙 둘러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1413년에 축조됐으며 둘레는 4㎞이었으며 높이 4.5m, 폭은 0.9~1.8m이었다. 성문은 허물어졌으나 상당수 성벽은 남아있는 상태다.

장녕성은 주변의 산세를 이용해 쌓은 산성이다. 서쪽만이 평지이고 동·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남쪽에는 남산이 위치해 있어 성벽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남산은 탐진천 쪽으로 급경사를 이뤄 방어에 매우 수월하다.

남문과 모정 뒷산에 있던 농민군은 13일 새벽 일본군과 1차 접전을 하게 된다. 일본군 교도중대는 남산 인근 대밭에 매복조를 숨긴 뒤 일부러 민병대 수십 명을 보내 농민군을 유인했다. 이를 모르고 민병대를 쫓아간 농민군 수십 명이 대나무 밭에 숨어있던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석대들 전투에 앞서 벌어진 남산전투에 대해 순무선봉진등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교도중대가 잠시 쉬는 사이 뜻밖에 비류 삼만 명이 고봉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까지 사과 들 가득히 수 십리에 뻗혀 봉우리마다 나무사이로 기를 꽂고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며 포를 쏘아대며 날뛰어 창궐하니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요 성내 부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 통위병 30명으로 후록 중봉의 적을 막게 하고 교도병으로 대나무 밭에 숨게 하고 먼저 민병 수십 명을 내보내 평원으로 유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로에서 공격하여 나가니 적이 도망하여 20리 밖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하다가 해가 저물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일본군들이 매복해 있던 대나무 밭은 지금의 장흥문예회관 근처이다. 남산에 모여 있던 농민군의 수가 비록 수천 명이었다 할지라도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대나무 밭 좌우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총격을 받아 피 흘리며 쓰러졌을 농민군들의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위의환씨는 <순무선봉진등록>등 각종 기록을 분석한 뒤 장흥 남문에 진치고 있던 농민군과 조일연합군 간의 전투가 13일 새벽에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씨는 일본군 1중대를 따라온 통위영이 13일 새벽 4시께 장흥에 도착, 농민군의 상황을 탐지한 뒤 전투를 벌였다고 말한다.

위씨는 또 장흥현지의 기록인 <박후의적>과 <영회단>, <임태희추기>에는 소모관 백낙중(伯樂中)의 역할이 과대평가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박후의적>에는 “소모관 백낙중이 경군을 이끌고 보성으로부터 와서 황혼 무렵에 곧바로 먼저 모정등의 적을 격파했다”고 적혀 있다.

또 <영회단>과 <임태희추기>에는 “해가 저물 때 소모관 백낙중이 왕사(王師)를 이끌고 곧바로 와서 건산리의 적을 격파했다”라고 건산(모정등)의 농민군을 격파한 것을 모두 소모관 백낙중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백낙중은 일본 군대의 조달을 맡은 자였다. 일본군 제19대 1중대를 위해 식량공급과 도로안내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말단 관리였다. 그는 군사를 지휘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농민군의 움직임을 살피기위해 미리 장흥으로 들어온 것을 유생들이 오해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유앵동(有鶯洞) 전투=양기수씨와 위의환씨등 장흥지역 사학자들은 유앵동 전투가 12월 13일 벌어졌으며 그 장소를 현재의 부산면 유량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유앵동 전투로 추정되는 기존의 국내기록과 일본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969년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된 <한국근대사> 1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흥부 북편 20리 지점에서 동학군은 일본군 및 관군과 지난 12월 13일에 격전을 벌인 끝에 패하여 흩어졌다. 그 후로 동학군은 군내 각처에 잠복하여 있었다. 일본군의 중대병력이 여기에서 머물러 수색전을 벌였다”

<1993년 발행된 <전남도지> 6권 207쪽 재인용>

또 부산수비대 4중대장 영목안민(鈴木安民)이 보성에서 부산의 병참사령관 겸 정박장 사령관인 이진야천리(伊津野千里)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장흥부의 북방 약 2리(20리)의 지점에서 싸워 크게 이를 격파해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같은 내용을 참조해볼 때 일군진압기록에 등장하는 ‘장흥부근戰’은 유앵동전투를 지칭한다. ‘장흥부 북편 20리 지점’은 유치면에서 부산면으로 넘어오는 빈재 밑의 현 유량리 일대이다. 빈재는 유치면에서 부산면과 장흥읍으로 넘어오는 관문이어서 농민군이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할 곳이다.

위의환씨는 이 유앵동 전투를 담당했던 부대로 이사경(李士京)이 지휘하는 부대를 지목하고 있다. 이사경은 유앵동과 지척에 있는 당시 용계면(龍溪面) 용반리 출신이다. 용계면의 동학세력은 남상면의 이방언, 대흥면의 이인환 세력과 함께 장흥의 3대 세력이었다. 따라서 상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kjhyuckchoi@hanmail.net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