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작전 주역은 ‘초신 퓨<Chosin Few>’ 아닌 장진 퓨(Jangjn Few)다”

20만 명 목숨 살린 흥남철수작전

미 해병 1사단 12여만 명, 중공군 30만 명 막아내

장진호 일대서 혹한·이질에 시달리며 17일간 사투

美 戰史 上 ‘역사상 가장 고전했고 위대했던 전투’
 

‘나라사랑 통일안보콘서트’
미래안보교육문제연구소는 지난해 11월27일 광주광역시 남구 송원고등학교에서 고교 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나라사랑 통일안보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날 학생들이 만원놀이패의 흥겨운 국악 난타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남성진 수습기자 nam@namdonews.com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은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 당시 중공군 개입으로 UN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이 피난민과 함께 선박 편으로 흥남항을 떠난 작전이다. 193척의 군함을 타고 군인 10만명과 민간인 10만명이 남쪽으로 탈출했다. 당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전쟁 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을 태우는 결단을 내렸다.

흥남철수 작전의 주인공은 장진호전투(長津湖戰鬪)를 치렀던 미 해병 1사단이었다. 1950년 겨울, 미 해병 1사단은 함경남도 강계를 점령하려다 개마고원 장진호 근처 곳곳 산속에 매복해있던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위기를 겪었다. 미 해병 1사단은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과 17일간 사투를 벌였다. 이들의 사투는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그래서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미군 전사(戰史)에는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이면서 한편으로는 미 해병대의 용맹성을 가장 잘 드러낸 전투로 기록돼 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13일까지 17일간 벌어진 전투다. 체감온도 영하 40도가 넘는 혹한에서 한·미연합군은 중공군 9병단 예하 12개 사단에 맞서 싸웠다. 당시 인해전술로 밀려든 중공군 병력은 30만명으로 한·미연합군의 10배가 넘었다.

한·미연합군은 중공군이 동부전선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 서부전선에서 고립돼있던 미 제8군의 철수와 목숨을 건 피난민들의 흥남철수작전도 가능케 했다. 함경남도에 위치한 장진호는 일대는 당시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총이 얼어붙는 맹추위였다. 군인들은 동상(凍傷)과 이질로 고통당했다. 땀 때문에 옷이 젖으면 동상에 걸리기 때문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웃옷을 벗고 참호를 파기도 했다. 사망자가 속출했다.

중공군 또한 장진호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전투력이 크게 손실돼 더 이상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중공군은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한다. 중공군의 후퇴로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에 도착한다.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한다. 이 작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 피난민 등 20여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정희윤 수습기자 star@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