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들 전투, 남도인의 불굴의 정신과 기개 드러낸 싸움

(46)석대들이 피로 물들기 시작하다

석대들 전투, 남도인의 불굴의 정신과 기개 드러낸 싸움

동학지도부 와해, 농민주력부대 해산 등 불리한 여건속에 당당히 치른 전투

남도땅 동학전개와 여러 전투는 갑오항쟁 중요한 부분…제대로 된 평가 받아야

위의환 향토사학자 “‘남도동학’으로 명명후 체계 입체적으로 연구해야” 주장
 

갑오항쟁,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모습
청일전쟁 당시 일본보병대의 사격모습. 일본군은 청일전쟁 승리후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에 나섰다. 최신 병기로 무장했다.

■장흥 석대들 전투 이전의 상황 요약

1984년 음력 12월 10일 강진 병영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다음 목표는 나주성이었다. 나주성을 함락시켜야 동학농민군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주성에는 관찰부산하의 관군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초토영 군사들이 있었다. 나주를 점령해야 동학농민군을 위협하는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장흥으로 회군했다. 12월 1~7일 사이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해 광주의 최경선, 손화중, 순천 영호대도소의 김인배 등 핵심 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거나 살해되면서 농민군 부대가 와해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가 이끄는 일본군 제19대대가 관군을 이끌고 12월 10일 나주에 들어왔다.

나주에 집결한 일본군과 관군 등이 강진을 목표로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장흥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농민군은 장흥 남문 밖과 건산 모정(茅亭嶝), 유치면 조양촌(현 유치면 소재지), 부산면 유앵동(유량리), 용산면 어산리 등지에 모여 장차 있을 조일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조일연합군 역시 공격목표를 강진에서 장흥으로 변경해 진격해왔다. 조일연합군은 네 방향에서 장흥으로 진입했다. 능주~장흥 방향을 비롯해 영암~병영~장흥, 나주 동창~장흥 유치면 조양촌, 나주 원정~장흥으로 들어와 동학농민군을 압박했다. 그 규모는 일본군 550명과 조선 정부군 240명 등 800여명 이상이었다.
 

1894년 인천항의 일본군들
일본군은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 곧바로 인천항을 통해 군사를 상륙시켰다. 일본은 조선정부가 철병을 요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를 주둔시키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후 조선은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하에 들어갔다.(인천광역시 홈페이지 사진)

12월 12일 아침 조양촌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조양촌 일대 농민군은 아침을 먹고 있던 일본군과 관군을 기습 공격했다. 피해를 입은 조일연합군은 영암으로 퇴각했다. 12일 히라기(白木城太郞)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본부 소속 부대가 가장 먼저 장흥읍내로 들어와 건산 모정 등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13일 새벽에는 남외리 남문 밖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20여명의 농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부산면 유앵동(유량리)에서도 이사경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져 농민군이 큰 피해를 보았다. 일본군 보고서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농민군의 피해가 끔찍했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 당시 행군하고 있는 일본군
일본군은 각종 공식문서에 조선동학농민군과 치른 전투를 청일전쟁의 일부분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촬영한 이 사진은 동학군을 토벌하기위해 행군하던 일본군의 사진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사진)

■장흥석대들 전투와 ‘남도동학’

장흥석대들 전투는 1894년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에 걸쳐 벌어진다. 석대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서 우금치전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전투다. 석대들 전투는 동학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사살당한 상황에서도 전남지역 농민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관군과 용감히 맞서 싸운 전투다.

위의환 선생은 1894년을 전후로 해 광주·전남지역에서 벌어졌던 농민들의 투쟁을 ‘남도동학’이라는 틀 안에서 연구할 필요가 크다고 역설하고 있다. 남도 땅 농민들의 투쟁과 자주정신이 너무도 소홀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전남땅에서 벌어졌던 농민들의 투쟁사는 지류(支流)가 아닌 본류(本流)로서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36년도 장흥읍 모습
일제가 촬영한 장흥읍 전경. 일제는 명소를 찍어 사진엽서의 배경으로 사용했다. 이 사진은 그런 엽서 중의 하나다. 장흥 삐비정에서 장흥동헌과 장흥성 남문쪽을 촬영한 것이다. 갑오년 항쟁이 벌어진지 40년 뒤의 모습이다. (정정진씨 소장)

위 선생은 지난해 12월12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전남지역 동학농민혁명 세미나에서 광주·전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남도동학’으로 명명하자는 제안을 했다. 기자는 위 선생의 이 제안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남도동학은 그 범위와 규모, 그리고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어서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보는 석대들 전투를 매우 상세하게 전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원고는 기존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연구발표문을 그대로 싣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데 더 낫겠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다음 회부터는 위의환 선생의 양해에 따라 선생의 연구내용을 그대로 전재할 생각이다.

위 선생은 지난해 12월 12일 장흥에서 열린 8개 군 향토사학자와 동학연구자들의 세미나에서 ‘장흥전투를 통해 본 남도 동학농민혁명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사업방향과 역할’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를 요약 발표했다. 본보는 우선 이 요약발표문을 전재한 뒤 선생의 저서인 ‘동학농민혁명 자료총서 1·2권’ 중 석대들 전투에 관한 부분도 발췌·소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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