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석대들이 농민군의 피로 붉게 물들다

(47)석대들이 농민군의 피로 붉게 물들다

농민군 석대들에 총집결한 뒤 일본, 관군과 최후 결전

자울재 넘어온 3만여 명 농민군 조일연합군 선제공격

숫적 우위 믿고 밀어붙이다 일본군 막강화력에 큰 피해

일군, 전투승리 후 26일 동안 농민군들 잔혹하게 소탕
 

1960년대 장흥읍 시가지 전경
다리 건너 우측 중앙부분이 지금 장흥에서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이다. 남산 아래쪽에 있는 가옥 대부분이 한옥이나 일본식 가옥이어서 강변의 초가집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1910년대 찍은 사진과 비교할 때 다리건너편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곳이 50여년만에 크게 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자산 아래 우측으로 펼쳐져 있는 들판이 석대들이다. (양기수씨 제공)

장흥 석대들에서 벌어진 석대들 전투와 관련해서 연구자마다 전투일자와 장소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기자는 장흥 향토사학자 위의환씨의 연구결과를 소개하기 전에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원광대 교수, 충북학연구소 김양식 소장의 연구를 먼저 싣고자 한다.

박맹수 교수는 <장흥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연구논문에서 ‘장흥 동학농민군의 재기병과 석대들전투’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10년대 장흥 탐진강변에 들어선 5일장 모습.
멀리 제암산(좌측)과 사자산이 보인다. 사자산 아래쪽 낮은 능선이 건산이다. 건산 우측으로 석대들이 펼쳐져 있다.
동학농민군과 조일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들판인 석대들이었다. 농민군들은 일부만 성능이 떨어진 화승총을 들었을뿐 대부분 죽창을 들고 일본군에 맞섰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예군사의 공격에 농민군들은 무참히 쓰러졌다. (양기수씨 제공)

■박맹수교수의 ‘석대들 전투’ 기술

(1894년 음력 12월)12일 남문 밖과 모정등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그날 밤과 13일 새벽 통위영병과 일본군으로 이루어진 30명의 토벌군 선발대와 1차 접전을 하여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하였던 것이다. 수천 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30명의 토벌군 선발대에 밀린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토벌군이 소지하고 있던 신식 무기 때문이었다. 토벌군 선발대와 1차 접전을 벌인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자울재를 넘어 남면(용산면), 고읍(관산읍) 등지로 퇴각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의 장흥지역 전투장소

그러나 토벌군의 신식 무기의 위력에 밀려 퇴각했던 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 사이에 다시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어 장흥부를 재차 포위하였다. 토벌군과의 전면전을 각오한 듯 농민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물론 농민군의 지휘자는 이방언, 이인환을 비롯한 장흥 지방 동학접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5일 교도중대장 이진호가 이끄는 경군과 일본군의 본대가 장흥에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농민군은 고읍 방향으로부터 자울재(眠峙)를 넘어 석대(石臺)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하여 장흥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 중에 있던 교도중대를 비롯하여 12일에 먼저 도착했던 토벌군 선발대 등과 전면전이 개시되었다.(중략) 고읍·어산 쪽으로부터 넘어온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판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 쪽으로 진출해왔다. 압도적인 병력을 믿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경군과 일본군에 맞선 것이다.

농민군이 경군 및 일본군의 유인 전술에 속아 산기슭으로부터 들판으로 밀고 내려오자 토벌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진을 벌여 일제사격을 하며 농민군을 공격해왔다. 기껏해야 2~30m밖에 나가지 않으며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조총으로, 그리고 죽창이나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자울재 너머로 통한의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식 무기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

■김양식 소장의 ‘석대들 전투’기술

12월 12일 아침 조양촌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조양촌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은 아침을 먹고 있던 일본군 3중대와 정부군 교도중대 일부를 기습 공격하여 영암으로 퇴각시켰다. 그날 저녁에는 히라기(白木城太郞)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본부 소속 부대가 제일 먼저 장흥읍내로 들어오자, 건산 모정등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과 접전이 있었다.

다음날 13일 새벽에는 남외리 남문 밖에서 전투가 벌어져 20여명의 농민군이 사살되었으며, 뒤이어 부산면 유앵동에서도 이사경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져 농민군이 큰 피해를 보았다.
 

충북학연구소 김양식 소장

이와 같이 12월 12,13일 이틀에 걸쳐 4번에 걸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다수의 농민군사상자가 발생하자, 수 삼만명의 농민군은 장흥 석대들로 총집결하였다. 그 주력부대는 남면에서 올라온 이방언부대였다.

이들은 일본군의 좌측지대와 중로지대를 공격하여 쌍방간에 하루 종일 전투가 벌어졌다. 화력과 전투력에 밀린 농민군은 일단 뒤로 밀려났다. 다음날 정오경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재차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석대들에서 오후 내내 혈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수백명이 총에 맞아 죽는 등 큰 피해를 보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뒤 12월 17일 옥산촌, 19일 해남 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등 간헐적인 공방전이 있었으나, 12월 14~15일 석대들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동학농민혁명의 대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장흥 석대들전투 이후 조일연합군의 소탕전이 끝나 모든 군대가 나주로 돌아오는 1895년 1월 11일까지 약 26일 동안 장흥일대에서는 피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 때부터 정부군과 지방관은 물론 일본군도 농민군을 붙잡는 대로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는데, 이는 일본정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장흥전투 이후 지방관들이 처형한 농민군으로 공식 집계된 숫자만 하더라도 장흥 300명, 강진 320명, 해남 250명 나주 230명 등 1천1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실제 위의환에 의하면, 장흥지역에서만 확인된 실명 전사자는 357명, 무명 전사자 1천165명에 이를 정도였다. 일본군은 10월 17일 용산 출발부터 나주를 떠나는 1월 11일(양력 11월 14일~1895년 2월 5일)까지 총 84일간 1/3이 넘는 32일을 나주에 머물면서 장흥지역 농민군 진압과 잔여 농민군 색출·처형에 주력하였으니, 당시 농민군의 피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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