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남문 대밭 日軍 매복에 걸려 수백 명 사망

<48. 석대들이 피로 물들다>

농민군, 남문 대밭 日軍 매복에 걸려 수백 명 사망

3만 명 농민군 수십리 산봉우리와 들판에 포진 장녕성 공격준비

사기 높았으나 첫 전투서 조일연합군 막강화력에 맥없이 무너져

자울재 너머 용산으로 후퇴한 농민군, 옥산촌 등지에서 최후항전
 

조선으로 출병하는 일본군 모습

1894년 7-8월 제작된 일청전쟁 기록 판화첩에 수록된 장면 중 하나. 좌측에 '일본조선지나도'라는 글이 보인다. 조선이 일본의 한 변방이라는 표현에서 일본 군부의 조선침략 야욕을 느낄 수 있다. 우측에는 조선국출군지도라는 글이 있다. 조선으로 일본군을 파병하는 것을 기리는 판화이다.

지난 회에서는 박맹수 원광대 교수와 충북학연구소 김양식 소장의 석대들 전투와 관련된 연구논문을 살펴보았다. 이번 회에서는 전주역사박물관장을 역임한 우윤 서강대 교수와 정읍의 향토사학가 최현식 선생의 ‘석대들 전투 관련 글’을 소개한다. 글은 우 교수의 <장흥·강진지역의 갑오농민전쟁 연구>와 최 선생의 <갑오동학혁명사>에서 각각 발췌한 것이다. 다음 회에는 천도교중앙총부 상주 선도사를 지낸 표영삼 선생의 <장흥지역 동학혁명연구>글을 소개한다.

■우윤 교수의 <장흥·강진지역의 갑오농민전쟁 연구>중 석대들 전투 관련 부분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장 미나미(南小四郞) 소좌의 지시에 따라 교도중대, 통위영병 등의 관군은 세 길로 나누어 강진으로 진격했다. 한 길은 영암 쪽, 한 길은 유치를 경유한 장흥 쪽, 한 길은 능주 쪽을 택했다. 이규태는 달아났던 벽사역 찰방 김일원을 앞세우고, (1894년 음력 12월) 12일 강진 병영에 도착했다.

이때 북상하려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남하함에 따라 방향을 바꾸어 장흥에 집결하였다. 엄청나게 그 수가 불어난 농민군은 남문밖과 건산리 뒷산 모정등(현 장흥고등학교 뒷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과 일차 접전하고 퇴각하였다. 다음 날 새벽 수만 명의 농민군이 다시 성 밑으로 집결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관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퇴각하였다.

15일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장흥읍에 도착하여 좌선봉 이규태의 통위영군과 합세하였다. 이제 농민군과 관군의 대회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농민군은 용산, 웅치, 부산 세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봉우리마다 기를 꽂아 놓고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아대는 농민군의 위세는 장녕성을 곧 쳐들어가 점령할 듯했다.
 

성환전투 승리 일본군 개선장면
성환 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한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경복궁에 들어가기전에 개선문이 있는 것처럼 설정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일본군부의 야심이 담겨져 있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돼 있고 외국외교사절단들이 일본군을 환영하고 있는 것 처럼 묘사해 조선진출을 합리화하고 있다.

석대전투에서 농민군의 포진상황은 이 전투에 참전했던 남외리 최옹의 참전실담이 <장흥군지>에 전해지고 있어 농민군 쪽의 유일한 자료인 듯싶다.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하지만 귀중한 증언임에 틀림없다.
 

조선폭동기

우측에 조선폭동기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일어선 농민들을 정규군 모습으로 그려 사실을왜곡했다. 조선농민군을 청나라 군사들의 모습인 것처럼 묘사해 이질감이 느껴진다. 일본군이 휘두르는 칼에 '조선폭도'들이 쓰러지고 있다.

이런 전세를 바라보는 관군의 기록에 “3만 명이 높은 봉우리 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에 이르기까지 산을 채우고 들에 퍼진 것이 수 십리에 뻗혀 있다. 모든 산봉우리 나무 사이마다 기를 꽂아 소리를 지르고 포를 쏘며 기세를 높였다. 세력이 너무 커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하여 농민군의 세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통위영군은 북쪽 주봉의 농민군을 막고 교도중대와 일본군은 성모서리 대밭에 숨어 있으면서 30명의 민병을 내보내 농민군을 산에서 석대들로 유인케 하였다. 농민군이 주변 계곡에서 석대들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민병을 공격하자 숨어 있던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농민군은 삽시간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농민군도 응사했으나 구식 화승총으로는 관군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용산쪽으로 후퇴하였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에서 바라본 석대들

1894년 12월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불꽃이 장엄하게 타오른 장흥 석대들 전경. 일제에 맞서 싸우던 농민군들의 조직적인 항쟁은 석대들 전투와 이후 벌어진 옥산촌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최현식 선생의 <갑오동학혁명사>중 석대들 전투 관련 부분

통위대 교장 황수옥이 이끄는 30명과 일본군 1중대 1소대는 당일 능주를 지나 다음 12일 밤늦게 장흥에 도착하여 13일 새벽에 남문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 수천 명과 접전하였다. 이 싸움에서 동학농민군은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주하였다.

그런데 12월 15일 12시경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대거 진격해 와 장흥부성을 포위하려는 때에 일본군 백목(白木) 중위 부대와 교도대가 뜻밖에 밀어닥쳤다. 이날의 전황을 교도중대장 이진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교도대가 도착하여 잠깐 쉬는 동안 뜻밖에 비류(동학농민군) 3만 명이 고봉 아래에서 주봉까지 만산편야(滿山遍野)에 기를 꽂고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아대고 있어 그 위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요 성내 부민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

일본군 백목(白木) 중위와 상의하여 통위병 30명으로 주종의 적을 막고 교도병으로 성 모퉁이 대밭에 복병시키고 민병 수 30명을 출석시켜 적군(동학농민군)을 평원으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양로에서 공격하여 나가니 적이 도망하여 20리 밖으로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하다가 해가 저물어서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과는 포살 수백 명이요 대소의 포 4좌, 회룡총 1정, 이밖에 많은 화살과 탄환을 노획했다”

 

일본군 한양입성도
한양에 입성한 일본군들이 조선관리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 판화. 우측에 여러개의 욱일승천기와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다. 좌측에는 단 한개의 태극기가 자리하고 있어 국력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 조선관리들은 모두 문신차림이어서 군복을 입고 있는 일본군인들과 대조되고 있다.

일본군이 제작한 일청전쟁판화(日淸戰爭錦繪)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약상 그린 판화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일본군 전투모습이나 위용을 새긴 전쟁판화를 제작해 남겼다. 전쟁판화 상당수는 小林淸親(고바야시 기요치카)가 제작한 日淸戰爭錦繪(일청전쟁니시키에)이다. 하나의 장면이 세 개의 판화로 이뤄졌다. 일본군은 조선농민들과의 전투(동학농민혁명전투)를 일청전쟁의 일부분으로 넣어 조선동학군과 농민들을 상대로 한 무참한 살육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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